[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언어는 지도와 같다. 언어는 실존 세계를 언어세계로 재구성하고, 언어세계는 인식체계로서 실존세계와 교류하며 영향을 미친다. 높고 높은 히말라야 산을 실제로 등반하는 산악인이 있고, 히말라야를 가지 않아도 ‘히말라야’라고 지칭하며 그 산을 집에 가져올 수 있다. ‘실존의 히말라야’와 ‘언어의 히말리야’는 서로 다르면서 같다.
언어는 실존세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삶의 방식은 언어 방식이 된다. 언어와 사물의 연결관계가 비개연성(우연성)으로 연결될지라도 삶에 대해 언어가 만들어진다. 자식이 태어나야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듯 사물이 있고 언어가 만들어진다. 우주가 존재하지 않고 ‘우주’라는 언어는 존재할 수 없다. 언어는 삶에 대한 지칭이다.
서양과 동양은 삶의 방식이 다르다. 삶이 다르면 언어도 다르다. 언어 사용법이 상당히 다르다. 존칭법의 유무도 그렇다. 서양에 존칭법이 없지는 않다. 우리나라는 존칭법이 단어자체까지 발달해서 배우기 곤란한 말로 분류된다. 영어로 ‘eat’로 끝날 단어가 우리는 ‘밥’과 ‘진지’와 ‘식사’로 구분된다. 동사도 단어에 따라 다르게 배정된다. 존칭법은 언어로 표현된다. 우리나라 민족이 예절과 질서와 전통과 경륜을 중시하는 전체주의적 공동체를 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외적침입이 얼마나 심했으면 단결력이 언어까지 집착되었을지 짐작하는 대목이다.
서양식 언어는 토론형이다. 토론형은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를 분석하는 것이다. 나는 최대한 높이고 상대는 최대한 낮춰서 승리하기 위해 언쟁(言爭)하는 것이 토론형이다. 상대의 말을 분석하는 것은 ‘비판의 칼날’이다. 이런 방식은 교육의 핵심과제가 된다. 비판의 칼날이 날카롭게 들리니, 상대의 주장을 분석한다는 말로 완곡해서 표현할 뿐, 상대의 말을 따지고, 나의 말을 관철하는 것이 토론의 주된 방향이다. 이런 언어문화는 한국적이지 않다.
한국의 언어문화는 인격적이다. 조선시대 당쟁은 무서운 언어문화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정치권력의 도구로 활용되는 언어문화이고, 보편적인 언어문화는 따뜻하고 포근하고 포용적이다. 한국은 본래 언어를 인격수양의 도구로 활용했다. 신언서판(身言書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말과 글은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도구였다.
듣기 과정은 상대의 말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말을 듣는 화자의 자세를 먼저 생각했다. 듣는 자세와 듣는 관계로 상대의 말을 파악했다. 이것은 들음의 과정을 중시한 것이다. 서양식 언어문화는 상대의 말뜻을 파악해서 논리가 부족하면 그 허점을 노려 공격한다. 반면, 우리나라 언어문화는 상대의 말이 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나는 제대로 듣고 있는지, 그 과정을 따지면서 듣는다. 듣기를 인격수양의 과정으로 삼아서 그렇다.
잘 따지는 것보다 말을 삼가는 것이 한국의 전통적 언어습관이다. 말을 삼간다는 것은 말함이 상대에게 전달되었을 때 파급되는 영향을 고려하고 조심스럽게 말한다는 뜻이다. 아니면 말고식 말부터 하고 보자는 요즘의 언어폭풍 홍수시대는 한국식이 아니다. 시대가 흐르고, 새로운 언어문화가 재창조되는 것은 맞지만, 한국 고유의 아름다운 언어문화는 보존하고 다듬는 것이 옳다. 언어를 인격수양의 도구로서 소중히 여기는 문화는 어디에도 없는 고유문화이다. 언어를 얼마나 귀하게 다뤘으면 언어자체에 ‘존칭법’을 설정했겠는가? 단어마다 질서가 있는 아름다운 언어가 한국어이다.
서양식 교육의 대세는 거스를 수 없다. 국제사회 중심은 미국과 유럽이다. 중국이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덩치큰 자본주의 공산국가’로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사드 배치한다고 하니 한국관광을 단속하고, 롯데제품 안먹기 운동을 벌이고, 한류배우 출연을 금지시키는 족속이 중국이다. (사드 배치하고 물건값 달라는 트럼프도 중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와 진시황제때부터 줄곧 갑질국가였다. 중국은 G2라고 해도 국제사회의 보편적 중심국가는 될 수 없다. 서양식 교육은 ‘나’(I)가 매우 중요하다. 나의 중요성이 얼마나 확정적이면 ‘대문자’로 쓰겠는가? 한자로는 ‘만들 공’(工)에 해당되는 그 ‘I’가 영어의 핵심이다. 영어는 자신이 매우 중요하고, 우리는 ‘공동체’로서 ‘우리’가 중요하다. 영어는 ‘나’, 우리는 ‘나와 너의 관계’를 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
토론문화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서양식 교육과 동양식 교육의 공통점은 자신의 표현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교육 핵심과제이다. 표현하려고 언어를 만든 것이다. 서양식 교육은 상대를 분석하고 비판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대체적 흐름이 그렇다. 반면 한국식 교육은 ‘나와 너의 관계’가 중요하므로 상대의 말을 비판하기 보다는 보듬는 표현을 할 수 밖에 없다.
서양식 표현이 상대에게 칼을 겨누는 것이라면 한국식 표현은 ‘칼’보다는 ‘손가락’을 찌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연결된 상대이기 때문이다. 가족끼리 대화하면 막말을 할 수 없듯이, 관계속에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한국식이다. 하고싶은 말이 100이면, 70은 안에 두고 30을 꺼내놓는 것이 한국식이다. 삼가는 언어, 보듬는 언어, 절제하는 언어가 한국어의 매력이다.
서양식 토론은 상대를 비판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비판하면 상대의 마음이 다칠 수 있고, 상대는 더 날카롭게 공격할 것이다. 토론이 끝나면 인간관계가 끝날 수도 있다. 한국식 언어문화로 상대를 포용하면서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언어의 결국은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임을 기억하면 상대의 표현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스스로 깨닫게 된다.
시선처리도 마찬가지다. 서양은 눈과 눈을 마주한다. 아버지를 향해 ‘너’라고 표현하는 서양식 언어는 평등이다. 우리는 다르다. 아버지를 ‘너’로 지칭할 수 없다. 상대와 대화할 때 “내가”라고 표현해도 그것을 트집잡는 것이 한국어다. “내가”는 영어에서 매우 합리적인 표현인데, 한국어에서 구박받는다. 언어문화가 달라서 그렇다.
존칭법이 있듯 한국 언어태도는 시선을 약간 아래를 보는 것이다. 시선을 마주보면 “대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서양식 언어습관은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반면 한국 언어문화를 시선을 쳐다보면 “함부로 눈을 쳐다본다. 예절이 없다”는 취급을 받는다. 한국문화와 서양문화가 뒤섞여 살아가는 지금은 우측통행과 좌측통행이 뒤섞인 엘스컬레이터처럼 혼재된 언어습관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시선처리는 모호한 방향으로 상대의 의향에 따라 표현해야한다. 쳐다보면 뭐라고 하면 약간 아래를 향하고, 쳐다보는 것을 마음교환으로 인식하는 상대라면 중간중간 눈을 마주쳐야 상대는 진심의 코드로 인식한다. 이는 언어습관의 혼재로 발생하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