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4월 4일 바쁜 하루의 항해를 마치고, 취재수첩에 기록된 빽빽한 밀림의 글씨들을 다시 돌아보면서, 다문화(多文化)의 방대함과 복잡함과 정교함과 가치성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됐다. UN이 2000년 평화선언을 하고도 지역적 전쟁과 국가내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은 봉합되지 못하였어도 지구촌 전체의 이념 방향은 ‘평화’로서 확정되었다고 봐야한다. 지구가족 큰형 미국과 둘째형 중국이 전쟁보다는 ‘평화’를 약속하고 있으므로…..
내가 정지윤 명지대 산업대학원 국제교류경영학 교수를 만나기전에는 ‘다문화’에 대해서 ‘하류층의 존재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국의 다문화정책에 물들어 있었던 탓도 있고, 다문화가정들에 대한 사회인식이 ‘국제결혼’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이미지화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땐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자녀가 이제 성장하였고, 130만명에 육박하는 인구수가 다문화에 속한다고 하니, ‘다문화’는 사회의 중심에 놓이게 됐다.
다(多)는 한자이면서, 한글이다. ‘모두’를 의미하고, 영어로는 ‘ALL’이다. 다(多)는 글자 그대로 본다면 고기(肉)를 포개놓은 것이다. 하나 위에 다른 하나를 얹어놓고서 ‘이렇게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녁 석(夕)이 2개 합쳐졌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저녁과 저녁이 합쳐진다는 의미가 너무 추상적이지만…. 다(多)는 ‘더하기’임에 분명하다.
정지윤 교수는 다문화를 거론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자국인 문화’를 포함하길 원했다. 이것이 다른 다문화 전문가들과 상당히 다른 점이다. 아마도 지구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처럼 그러한 것이다. 모두가 ‘다문화 가정’에 집중할 때, 정지윤 교수는 다문화 가정과 그 가정이 속한 마을을 함께 포함해서 다문화정책이 펼쳐져야한다고 말한다. 지구도 태양계의 행성이듯, 결국 우리도 ‘다문화’의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할 때 다문화정책은 보다 효과적으로 정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진화론에서 ‘돌연변이’를 통해서 종의 변이가 이뤄졌다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돌연변이에 해당하는 ‘왕따’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짙다. 인간의 수명이 100년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너무 큰 변화를 원하지 않아서일까? 자신만 옳다는 고집때문일까?
과거 효종때, 제주도에 네덜란드 선원이 표류했다. 그 유명한 하멜 일행이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돼, 효종을 알현하고서 효종의 경호원이 되었다.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에 해당하는 훈련도감에 편입돼, 왕을 지키는 경호원이 되었으니 출세한 것이다. 왕이 월급도 줬다. 당시 청나라를 상대로 ‘북벌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효종이 제대로된 다문화정책을 펼쳤다면 하멜일행을 경호원으로 쓸 것이 아니라 훈련도감의 장교로 임명했어야 했다. 청나라와 대항해서 싸울 수 있는 네덜란드 선원들은 지금으로 본다면 ‘미국 특수부대’에 해당한다. 북벌정책을 꿈꾼 효종에게는 하멜일행이 ‘복덩이들’이었다. 그러나, 효종은 훗날 하멜일행을 강진으로 유배시켜버린다. (하멜 일행중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망명요청을 하면서 발생한 일이지만….)
지구는 이미 인터넷망과 비행기와 배들의 교통수단으로 지구촌이 되었다. UN세계관광기구 탈렙리파이는 청와대를 방문해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로서 관광실크로드”를 강조하기도 했다. 중국을 중심으로 추진된 AIIB(아시아 철도와 교통·도로·항만 등 인프라 시설의 투자를 위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제 국제화시대는 고속도로에 진입한 것이다.
지구는 문화가 다른 국가들의 집합체이다. 외국에 나가려면 경제적 여유가 필요하고, 1~2년간 해외어학연수를 받으려고 한다면 상당한 경제적 자금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UN국제기구에 근무하고 싶어하는 자녀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답은 간단하다. 영어를 공부하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다양한 민족의 문화를 직접 배우는 것이다. 결국, 다문화가 답이다.
우리가 외국을 나가면 외국인은 우리라는 창문을 통해서 한국을 보게 된다. 국민은 곧 국가의 창문이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국제결혼을 통한 2세들은 그 나라에 대한 ‘창문’이면서, 그 나라에 대해서는 ‘한국의 창문’이 될 수도 있다. 2개의 문화를 함께 경험한 문화소통 전문가로서 다문화자녀들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복덩이들’이 어쩌면 다문화 자녀들이 아닐까? ‘미운 오리새끼’처럼. (이 말은 정지윤 교수가 여러번 강조한 대목이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늘어갈수록 우리 사회는 보다 문화적으로 따뜻해지고 포용과 배려로서 탄력성이 붙는 국가가 될 것 같다. 다문화 학문의 방대함을 종합편성하는데 일조를 한 정지윤 교수에게 마음담은 박수와 응원을 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