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교회 식사 봉사사역에 동참했다.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내가 무슨 쓸모가 있을까, 걱정도 되었으나, 중년의 나이를 살아가면서 어떤 단체, 어떤 모임, 어떤 소속에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하면서, 시간을 특별히 구분해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내일 메뉴는 닭계장, 식당에서 사먹으면 6천원~7천원, 혹은 1만원을 내고서 식사를 사먹는 것이 편한데, 내가 다니는 교회는 토요일에 음식을 장만한다. 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면서 모임도 하고, 저렴한 식사비용과 함께 남는 수익금은 선교비로 후원한다.
부엌안에 들어가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집에서 요리를 하더라도, 라면을 끓여먹거나, 슈퍼에서 포장된 육개장을 끓여먹거나, 육수국물에 떡국을 넣고서 해먹는 것이 전부인 요리실력인지라, 일찌감치 부엌 구석에서 장애물이 되지 않으려고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 함께 온 남자 집사는 자주 식사 봉사 사역에 동참한 듯, 활용폭이 넓었고, 부엌칼처럼 혹은 도마처럼 요긴하게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것 같다.
닭 6마리가 껍질을 뒤집어쓰고, 엎어져 있다. 분명, 살아서 꼬끼오 했을 그의 운명이 이제 닭계장의 재료로 변화할 숙명이던가. 그 옆에는 닭발이 수백개는 될 듯 하다. 닭발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닭발을 보면 물어뜯고 싶어하지만, 나에게 닭발은 달갑지 않은 존재일 뿐이다. 벌레를 만난 듯, 멀리서 고무장갑을 끼고 있으니,
“남자 집사님 두분은 닭을 손질하세요!!!”
군대용어로 말하자면, “삽들고 구덩이를 파세요”와 같은 군대장의 명령이다. 부엌에서는 삽과 괭이 대신에 칼과 국자를 들고서 각자의 임무에 충실했다. 하기사,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도 요리에 욕심이 있어서, 해병대 시절 취사병을 맡은 적이 있다. 내가 요리한 그날 저녁, 선임들은 나를 몇 번씩 쳐다봤다. 소금과 설탕으로 섞어서 맛을 내다보니,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는 ‘모호함의 경계선’이었다. 그 이후로, 당번제로 돌아가는 취사병에서 나는 제외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닭을 생닭으로 만나보니, 아주 처량하다. 사람의 명예가 그와 같은가? 닭은 깃털이 있고, 톡톡톡 돌아다니면서 우렁차게 새벽을 밀쳐야, 그 기세가 볼품있다. 내 앞에 펼쳐진 닭 6마리는 닭털을 모두 뺏겼으니, 그저 흐믈흐믈하다. 그것을 씻는다는 것은 내부의 내장을 모두 드러내는 것인데, 장갑을 끼고서 목욕탕에서 피부를 밀 듯 벗겨대니, 그것도 재밌다. 단지, 닭들이 꿈에 나올까, 혼자 기우(杞憂)에 빠졌다가, 얼른 씻고서 다른 다라에 옮겼다.
그렇게 3번을 번갈아 하고서, 제법 일을 했다는 자부심으로 일어나, “이제 뭘 할까요?”라고 물으니, “한번 더 씻으세요”라고 한다. 역시, 요리는 재료의 신선함에서 비롯됨을 다시 확인한다. 먹을 때는 그저 시장에서 사온 재료를 물에 넣고 끓이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과정이 제법 복잡하다. 닭발도 수백개 되는 것을 부득부득 씻었더니, 그것을 커다란 냄비에 넣고서 끓였다가 물을 버렸다. 그리고 다시 큰 냄비에 넣고서 끓인다. 대충하는 것이 전혀 없다.
함께 일한 남자 집사는 “닭 껍질까지 벗길까요?”라면서 일을 만든다. “그렇게 해요”라는 말 한마디에, 우리는 닭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통닭의 껍질을 벗긴다는 것은 쓱 벗기니 그냥 벗겨진다. 그리고 닭다리와 날개, 살이 남는다. 껍질을 벗기니, 정말로 닭만 남았다.
다른 쪽에서는 파와 양파와 마늘을 도마에 넣고서 지속적으로 다듬는다. 눈이 제법 매울 것인데, 익숙한 요리사들이라서 그런지, 맵다는 표현을 전혀 하지 않는다. 닭발을 큰 냄비에 넣고서, 양파와 마늘을 수십개 함께 넣는다.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넣는다고 했다. 요리(料理)가 ‘재료의 다스림’으로 풀이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불과 물만 있다고 해서 요리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재료의 신선함, 다양한 재료들의 조화, 재료의 특성을 인식하고서 절절한 온도위에서 재료를 다루는 기술, 무엇보다 정성껏 요리를 하려는 마음 가짐이 중요한 것 같다. 요리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모두 머리카락이 들어가지 않도록 머리에 위생모를 쓴다.
2시간의 식사 봉사 사역이었지만, 집안에서 배운 요리실력을 함께 협력해서 교인들의 음식을 만들기 위해 모인 손길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어쩌면, 내일의 말씀요리도 그렇게 우리 성도를 위해 준비가 되고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이 준비되기까지 성직자의 순결하고 거룩한 헌신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부엌안에서 매운 연기를 마시며 정성을 다하듯, 성직자의 고독과 고통속에 말씀의 요리가 단상에서 펼쳐짐을 나는 믿는다.
오늘 식사 봉사사역에 잘 다녀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