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영화칼럼 / 장창훈]=차태현, 소방관으로 ‘정의로운 죽음’을 택해, ‘귀인’(貴人)의 칭호를 받고, 잘 죽은 인물이다. 발상의 전환은 죽음을 ‘새로운 탄생’으로 규정한 이 영화의 도입부다. 시작부터, 심플하다. 소방관 차태현이 죽었다. 그것이 영화의 시작이며, 이후 무대는 바로 바뀐다. 기존 영화와 차별화를 이루는 부분이다. 기존 영화는 도입부가 지리멸렬하다. 배경과 진입부분이 차지하는 설명, 이 영화는 없다. 마치, 모든 관객들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공감’을 가지고 있다고 설정한 것이다. 그것이 흡인력의 묘책이었나? 내가 봤던 장안평 롯데시네마 12층에서도 저녁시간대인데도 좌석이 가득찼다.
죽음 이후에 등장하는 사람들, 즉 염라대왕이나 혹은 천사들이 완벽한 존재로 우리는 인식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들도 생각이 있고, 판단의 논리구조가 있으며, 판결을 변호하는 변호사도 있다. 도대체 이러한 설정은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성경에서도 이 세상은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했다. 그림자를 통해서 저 세상을 추정한다. 변호사는 판결을 받는 피고인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법률제도이다. 망자가 된 차태현은 귀인으로서 7번의 재판을 앞두고 있는데, 무료변론에 나서는 변호사들을 만났으니 행복한 일이다.
솔직히, 무료변론을 나서는 국선변호사들은 일을 안한다. 변론만 맡고, 피고인을 위해서 재판이 있는 그 때만 나와서, 대충 훑어보고서 대충 하고 만다. 국선변호사들의 월급이 도대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작은 금액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승소판결에 따른 국가의 성공보수제도가 없어서 그런지, 열정은 없다고 봐야한다. 변호사들이 변호목적보다는 ‘돈’에 목적으로 둬서 그렇다. 만약 변호가 목적이라면 국선 변호사들은 변론을 맡은 피고인과 자주 미팅을 하면서 그 사건의 진실을 알고서 변론에 임했을 것이다. 대부분 국선변호사들은 변론의 책임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 저승세계 무료변론을 맡고 있는 변호사들이 얼마나 책임을 갖고,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지, 염라대왕과 맞짱을 뜨면서까지 자신이 맡은 생명을 어떻게 변호할지, 전략을 강구하면서, 변호사로서 자격까지 내놓으면서 변론하는지, 그것을 진지하게 보면 좋겠다.
우발적 사고, 군대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평범한 총기사고, 그러나, 그 사고를 둘러싼 은폐,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저승세계를 다루면서, 그 저승세계가 이승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연결고리를 ‘원귀’라고 표현했다. 원한이 맺힌 귀신이 가족중에 등장하면, 저승세계는 혼돈으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주인공의 동생이 군생활 제대를 앞두고, 정말로 우연히 후임의 총기오발 사고로 사망했다. 그런데, 아직 살아있었는데, 그 부대장을 잘못 착각하고서 묻어버렸다. 하루동안 살아있었는데, 생생하게 느끼면서 차가운 흙속에서 하루동안 죽음의 과정을 겪으면서 원귀가 된 것이다. 그로인해서, 저승세계는 혼론으로 뒤바뀌면서, 강림을 맡은 하정우는 이승세계로 내려와서 원귀의 출처를 찾아서 탐색한다. 이러한 설정은 가족의 중요성, 이승과 저승의 상호관계, 우연의 인맥을 통해 연결되는 사회의 다변성, 보여지는 것의 전혀 다른 의미해석, 등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