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드라마 칼럼 / 장창훈]=황금빛 내인생이 절정을 향하고 있다. 최도경이 부잣집 도련님의 자격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한 사건 자체가, 시청률의 급상승을 가져올 충분한 반전이다. 과연, 금수저가 행복과 동격일까? 전혀 그렇지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행복의 감정은 자신의 내면과 상대와 관계에서 발생하는 마찰력과 같아서, 갈등과 행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진정 자신의 내면에 행복의 파문이 일고 있는지, 그것은 자신만이 알 수 있다. 거울에 비치는 표정은 자신과 상대가 거의 비슷하게 보겠지만, 내면의 마음은 자신이 안다. 최도경은 내면의 가치를 서지안의 순수함에서 보았던 것이다. 흙수저와 금수저는 사실 경제적 관점과 측량으로 만들어진 단어에 불과하다. 이는 마치 귀족과 노예의 상징성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흙수저의 패배주의는 어디서 기인할까? 황금빛 내인생에서는 수저의 종류보다 인생 스스로 결정하는 선택의 관점이 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서지안과 서지수는 분명 서로 다르게 태어났는데 쌍둥이로 키웠으니 자신들이 쌍둥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그래서 서로 보면서 닮았다. 닮았지만, 서로 다르다. 특히,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서지안이 겪은 그 충격적 사건, 자신의 정체성이 2번이나 크게 흔들렸던 사건이 자신의 내부를 완전히 드러냈고, 텅빈 자아속에서 자신의 진정성을 발견하면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에 진지한 접근을 하게 된다. 반면, 서지수는 여전히 자신보다 상대의 관점과 배경에 집중한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한데, 서지안이 선우혁을 좋아했다고 착각하는 이유가 선우혁과 서지안이 서로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는 과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습성에서 비롯된다. 서지수처럼 우리들도 자주 그렇게 착각한다.
언론에서 보수언론이 보수적 기사를 계속 쓰고, 진보언론에서 진보기사를 지속적으로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잇다. 보수주의는 어떤 사건을 보수적으로 이해하고, 진보주의는 진보적으로 이해한다. 그 사건의 실체에 관심있는 사람은 드물다. 만약, 보수언론에서 어떤 사건의 실체를 알린다면서 진보적으로 해석해서 기사를 낸다면 당장 독자들의 항의를 받아야한다. 왜 허위 기사를 썼느냐는 독자들의 비판이 쇄도할 것이다. 독자들이 믿고 싶은 것을 쓰려는 경향이 언론사에 있는 이유도 사람의 심리때문이며, 언론사와 독자는 이러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서지수의 경우도 비슷하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 즉 자신의 패배주의이고, 자신은 항상 서지안에게 미리고, 특히 좋아하는 사람의 고백을 받았지만 그 고백이 사랑일 수 없다고 단정해버리는 것, 자신의 내면보다 보여지는 주변이 중요한 ‘협력인성’이 발달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과연, 서지안과 최도경이 무사히 결혼에 골인할 수 있을까? 실상 기업드라마였다면, 최도경과 서지안을 공격하는 할아버지의 심리묘사, 사건전개가 펼쳐질 것이 분명한데, 이 드라마는 전혀 그렇지 않다. 보통의 흐름전개에서 상당히 벗어났다. 할아버지 정도으 위치라면, 이미 최도경이 집을 나가고 얼마 있다가 바로 서지안의 존재를 눈치채고서, 사건의 폭풍이 일어났어야 한다. 물론, 이런 사건 전개는 통속적이고, 일반적이다. 그러나, 시청자들이 익숙하게 재미를 느끼는 전개방식이기도 하다. 황금빛 내인생은 그런 사건전개를 취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돌발전개, ‘반전’의 ‘반전’으로 시청자들의 허(虛)를 깊숙이 찌르고 있다. 최도경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서지안과 함께 쉐어하우스에서 살고 있다는 발상 자체가 작가의 창의성이 돋보인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상황을 발견했을까? 집의 책상위에서 얻을 수 있는 소재는 분명 아닐 것 같다.
서지태의 경우도 가슴이 애달프다. 아이를 가졌는데, 혼전 계약서 1조1항에 “아이를 갖지 않는다”고 되어 있어서, 낙태수술을 받을거라는 아내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는데, 서지태는 그 심장소릴 듣고나서 ‘생명의 존귀함’을 느끼고, 양심의 가책과 함께 아내 설득작전에 나서지만, 쉽지 않다. 실수로 갖게 된 생명이지만, 서지태는 책임을 지고 싶고, 아내는 그 책임 때문에 묶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서지태는 우선 현실에 대한 책임, 아내는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면서 태어날 경우 양육해야할 책임, 교육의 책임까지 생각하면서 포기의 심리가 작동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심리지만, 드라마에서는 웬지 낙태수술의 부당성이 매우 강조되는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황금빛내인생을 보고 있으면, 내면과 외면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참된 가치의 방향을 인지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내면에 방점을 둔다. 돈이 좋지만, 그 돈이 내면의 마음까지 조종할 수는 없다. 사람이라면, 사람이 만든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과 더불어 지금껏 살아왔지만, 인간에 예속되어 살지 않는 것처럼, 사람이 사람의 창조품인 돈과 명예와 물질에 갇혀서 산다면, 그것보다 못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물질을 움직이는 두뇌역할을 한다. 나는 그 가치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