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임의 십자가를 짊어진 달팽이처럼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간혹,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해야할 때가 있다. 마음이 갑자기 자석처럼 끌어당기거나, 마음이 심란하거나, 너무 일찍 일어나거나 기타등등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보다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경향이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다. 본래, 고등학교 2학년때 나는 매일 새벽기도를 했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벽기도보다 드라마를 좋아하다보니, 저녁중심형 인간으로서 새벽은 묵직한 역기와 같았다.
새벽에는 택시를 타고 교회에 간다. 2주 정도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운전하는 택시기사마다 스타일이 정말 달랐고, 어떤 택시기사에게 내가 “000 길로 가주세요”라고 했더니, 그 택시기사는 베테랑이었던 것 같다. 내가 말한 그 길로 가면서도, 도착해서 “정말로 빨리 가려면 반대편에서 타야죠. 용마터널로 가면 5~10분은 단축될 수 있어요. 톨비가 1500원이 드는데, 톨비만큼 택시비가 절약될거예요”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새벽기도를 끝내고 용마터널로 장안평까지 왔다. 그 택시기사 말은 사실이었다. 시간도 단축되고, 택시비는 200~500원 정도 적게 나왔다. 무엇보다 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에 기뻤다. 왜 이렇게 빠른 길이 있는데, 택시기사들은 알려주지 않았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1500원의 톨비 때문이다. 택시기사들은 손님들에게 톨비부담을 줄까봐 더 빠른 길이 있어도 안내를 하지 않고, 손님들은 용마터널의 지름길을 알지 못하면 그 길로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양쪽의 모든 길을 가봐서, 용마터널이 더 빠르고 경제적인 것을 알고 있다.
기회비용으로서 돈을 지불해야할 것은 지불하는 것이 옳다. 터널을 지나면, 터널비를 내야한다면 내야한다. 그것이 타당하다. 식당에 가면 밥값을 내야지, 밥값을 내지 않고서 밥을 맛있게 먹을 수는 없다.
중년의 나이를 살아가면서, 나에게 십일조의 습관이 있다는 것에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때부터 시작됐던 십일조 습관은 사실 쉽지 않았고, 대학교 시절에 해병대를 전역하고 한달에 200만원의 돈을 벌 때도 십일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9년이 되면서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하나님께 십일조 습관을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나를 재전도 관리해준 전도사님이 ‘십일조’가 철저했던 것이 특히 촉매제였다.
국가도 국민이 십일조에 해당하는 부가가치세와 종부세 와 법인세등을 내야만 재정이 운영된다. 집에서도 부모가 월급을 가족경제를 위해서 내놔야만 가족경제가 돌아간다. 누군가 경제를 책임지지 않는다면, 내부경제의 혈관에 혈액이 돌아갈 수가 없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내가 성도로서 살아간다는 것, 나는 많은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 삶에 책임을 지면서 십일조 습관을 ‘납세와 감사의 의무’로서 행하고 있어서, 내가 나를 보며 뿌뜻했다.
마태복음 17장에도 베드로가 예수님과 자신을 위해 성전세를 바친 내용이 나온다. 내지 않아도 될 반세겔의 성전세를 세리들이 독촉하니, 물고기를 잡아서 세금을 내라고 했다는 사건이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이 내용은 십자가 사건이 있기 바로 직전에 나온다. 마태기자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 당시에 기독교인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로마에 세금을 내야하는가? 내지 말아야하는가? 세금을 내면 이스라엘 민족으로부터 배신자의 비난을 받을 것이고, 세금을 내지 않으면 로마로부터 세금미납자 징벌을 받을 것이고…..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를 향해 독립투쟁을 하던 시기였다. 세금을 내는 이스라엘 백성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친일 매국노로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도들에게 그런 민원이 정말로 많이 들어왔다. 마태는 그러한 사람들에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그 사건을 기록으로 남겨놓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국,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는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지키는데도 필요한 덕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짊어져야한다”고 했는데, 책임의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나는 오늘도 살아가야겠다. 한 마리 달팽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