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윗은 왕으로서 성전문지기를 원했다.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오늘, 성전을 청소했다. 마음이 뿌뜻하고, 행복하다. 나의 양심이 마치 목욕탕에 다녀온 듯, 밀대로 성전바닥을 힘껏 청소하는 기쁨이 흥겨웠다. 오후 6시를 맞춰, 일정을 끝내고 교회로 출발하는 것, 나의 신앙이다. 왜 주일마다 청소를 하는가, 교회관리부에서 직접 맡아서 하면 안되나, 그런 생각들이 나에게 자주 있었으나, 성전은 하나님의 몸이라고 상징을 믿음으로 인정하니, 청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무보다 책임으로 청소도구를 들었다.
군대도 징집으로 하느냐, 지원으로 가느냐가 다르다. 나는 해병대 출신으로 지원병이다. 대학교 2학년때 해병대를 지원해서 들어갔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사람은 책임감이 강하지만, 징집처럼 끌려서 하는 사람은 의무감 때문에 ‘부담감’에 눌린다. 똑같은 일이라도 어떠한 마음으로 하느냐로 일의 성패가 달라진다. 마음을 바꾸니, 청소하는 것도 내 삶에 활력소가 되고, 청소하는 날이 돌아오면 그날은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성전을 향한다. 오늘도 그러했다.
청소할 때마다 ‘장의자 옮김’이 문제였다. 몇해전 성전청소할 때는 장의를 뒤로 쭉 날랐다가, 다시 앞으로 쭉 날랐다가, 모든 청소가 끝나고 줄을 맞췄다. 물청소를 했다는 그 기분은 장의자를 옮김으로 청소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러나, 그것은 상당히 고된 일이고, 청소의 본질과 약간 거리가 멀었다. 왜 장의자를 날라야하는가?
요즘은 청소의 달인이 되어서, 장의자를 그대로 두고서 진공청소기가 장의자 밑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이러한 원리는 방안에 로봇 청소기가 청소하는 것과 흡사하다. 로봇 청소기는 침대밑도 자유롭게 들어가서 먼지를 깨끗이 빨아버린다. 먼지털이로 대청소를 한다고 가구를 들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청소의 본질은 아니다. 로봇 청소기는 단추만 눌러도 혼자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방안을 깨끗이 쓸어담는다. 청소는 결국 먼지를 없애는 것, 신발의 흔적을 없애는 것, 장의자 줄을 맞춰서 예배를 준비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청소할 때는 장로든, 집사든, 권사든, 평신도든 모두 동일하다. 회사청소를 한다고 하면, 회장이 밀대를 잡을 수 없다. 회장이 밀대를 잡고서 화장실 청소를 했다면, 건물 청소 아줌마는 다음날 해고를 당할 것이다. 회장이 밀대를 잡아서는 결코 안된다. 그러나, 교회청소는 사회에서 회장이든, 의사든, 변호사든, 사장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 청소하면서 그러한 모습이 보였다. 생각해보니, 의사도 자기 방의 쓰레기통은 자신이 버린다. 그처럼 하나님의 성전인데, 사회적 직위가 무슨 필요가 있으랴.
얼마전 문재인 대통령이 56명의 별들에게 삼정도(三精劍)을 선물했다. 준장을 다는 별들에게 삼정도를 증표로 준 것이다. 대령이 별을 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그러한 별들도, 사령부에 가면, 이등병과 거의 흡사하다. 사령부에는 준장이 밀대를 잡고서 청소를 해야한다. 계급은 상대적이다. 집안에서 아버지는 절대적이지만, 절대적인 아버지도 회사에 가면 과장으로 부장과 사장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간다. 모두 상대적이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전을 청소하는데 무슨 직위가 필요할까?
오늘도 나는 열심히 살았다. 지금은 7시 56분, 5분후 황금빛 내인생이 시작할 것이데, 오늘은 본방사수를 못하겠지만, 그래서 행복하고 좋다. 성전청소를 마치고, 20m 전방에서 파란불 신호등이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달려서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넜더니, 내 앞에 370번이 대기하고 있었다. 줄행랑치는 심정으로 370번을 따라잡으려고 정류소를 향해 달렸더니, 1초 차이로 370번이 멈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운전수가 다시 열어준 문으로 올라선 나의 370번,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인생은 뛰면서, 하루 하루에 최선의 책임을 다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