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주일에 교회에 다녀오는 행복은 밥먹을 때 밥먹는 낙(樂)과 같다. 기쁨은 낙(樂)이고, 맛(味)이고, 즐거움이다. 혹자는 주일에 등산(登山)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혹자는 주일에 빈둥거림의 여유로 기쁨을 삼는다. 달팽이가 약간 습한 곳에서 야채에 붙어 기어다니는 것을 삶의 낙으로 삼듯, 스스로 길들여지는 삶의 습관이다. 나는 주일에 교회가는 것이 좋다.
물론, 주일예배 외에도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관람하거나, 정부의 발표 보도자료를 분석해서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취재를 하거나, 다양한 재미가 있다. 그 중에서 주일예배는 말씀을 들으면서 나의 가치관과 양심과 영혼의 영점조정을 하는 것이 흥겹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나는 반드시 노트에 기록한다. 오늘도 5P나 기록했다.
사람의 심리는 참 단순하다. 까페에 있으면 까페의 배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영향을 받고, 까페를 떠나면 그 영향권이 그대로 벗어난다. 참 약하면서 민감한 존재다. 낮에는 낮의 영향권에 지배를 받고, 밤에는 밤의 그림자가 사람을 지배한다. 어쩔 수 없는 주관권의 세력이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여 생각이 하나님께 연결되는 것, 그것은 예수님이 말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사는 것”과 같다.
오늘은 마태복음 7장 21절을 본문으로 주일예배 설교가 진행됐다. 원본은 내 인생의 스승, 정명석 목사님이 친필로 기록했고, 설교단상에서 대언자가 감동과 심정의 선율로 묵직하게 선언했다. 나의 생각이 인본적이지 않고, 신본적이길 간절히 바랄 때에는 설교단상의 말씀이 강물처럼 나에게 밀려온다. 해변에서 바라보는 밀물의 아름다움처럼 분명하게 보이는 말씀의 출렁거림이다. 간혹, 세상문화와 생존경쟁에 지쳐 교회에 가면, 위로의 음성이 잔잔히 나에게 스민다. 그렇다. 말씀은 언제나 나의 답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버스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루터를 통해 우리에게 선물해준 성경과 하나님과 1:1 신앙의 은총이 너무 보편적 가치로 흐른 측면이 많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전에는 말씀은 오직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다. 만민구원설이 당연한 것 같아도, 성경의 기록이 불경처럼 아주 어렵게 되어 있어서, 사서삼경이 한자로 되어있던 시대처럼 성경이 성직자만 읽을 수 있는 문자로 기록된 시대가 있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성경번역을 했던 것, 그 덕분에 성경번역본은 인쇄술에 힘입어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고,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경을 깊게 읽으면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날마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업의 관점에서 성경연구는 성직자만 하고, 일반인은 직업에 충실하고 주일에만 교회에 가는 것을 신앙생활로 착각했던 나의 오해가 오늘 풀렸다. 드라마를 좋아하듯 성경읽기를 좋아했던 나의 순수함이 흐려진 측면이 많다. 황금빛 내인생처럼 성경은 영계의 황금보화가 들어있는 보물창고임에 틀림없는데, 내 삶의 구석에 밀려있으니, 나는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스스로 뉘우쳤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상고하고, 연구하면서 내 삶속에 다시 적용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신앙은 성직자든, 평신도든, 모두가 반드시 해야할 운명적 필수과목이므로.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준 것이 진정 큰 것이다”
– 주일말씀 중에서 / 정명석 목사님
오늘 말씀중에서 내가 가장 은혜받은 대목이다. 머리에 망치로 얻어맞은 듯, 과거가 생각났다. 내가 얻은 것, 내가 겪은 것 몇가지가 떠오르면서 다시 한번 내 삶의 내면이 정돈되었다. 열흘 전, 집안정리를 하는데, 책꽂이에 빽빽하게 꽂힌 책들을 보는데, 밀림처럼 보였고, 성경은 찾을 수 없는 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얼마나 부끄럽던지, 내가 작정하고서, 성경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성경을 중심으로 책들을 정리해버렸다. 그렇게 정리하니, 100권 넘는 책들이 버려졌고, 비로서 보다 신앙적인 서적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시간을 조금씩 성경에 근접하게 사용하는 생활습관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민족으로서 지금 진행되는 북한과 새로운 관계개선, 평화의 여명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며, 특히 시진핑과 트럼프가 원하지 않는 방향이다. 시진핑과 트럼프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으면서 전쟁기운이 남아있는 ‘휴화산과 활화산’의 중간지대를 지향한다. 앞에서는 한반도 비핵화를 원하지만, 뒤에서는 한반도 전쟁설을 증폭해 무기를 팔아먹으려는 속셈이 미국에 다분하다. 중국도 동아시아 패권국가로서 세계에서 G1국가를 꿈꾸지만, 북한이 이렇게 갑자기 남한에 내려울 줄이야. 1945년, 그때 만약 러시아의 군정권과 미국의 군정권이 북한과 남한에 각각 정부를 세우지 않고, UN이 권유했던 남북한 단독정부를 세웠더라면 한반도 분열은 없었을 것이다. 통일신라때로부터 시작된 외세의 힘으로 얻은 통일은 언제나 내정간섭의 불안함을 남긴다. 1945년과 2018년이 서로 다른 것은 남북한이 직접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변수이며, 갑자기 찾아온 ‘서울의 봄’처럼 행운이 도래한 것이다. 누구든 북한이 갑자기 돌변할 확률이 높다고 주장하여도, 지금 현재 북한이 남한과 함께 평창올림픽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앞에, 나는 신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정권의 내부에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올림픽에 참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올림픽을 기점으로 남한과 북한이 새로운 관계개선의 문을 열었다는 것은 역사적 변곡점임에 틀림없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한반도에 평화의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였다. 솔직히, 트럼프는 한반도 평화에 관심조차 없고, 시진핑은 한반도 평화를 빌미삼아 자국의 이권만 챙기는 국가이다. 트럼프는 한반도보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선포에 관심이 많았다. 자신의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UN과 세계각국이 반대함에도, 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포했다. 그것만 보더라도 트럼프의 주된 관심사가 중동지역의 이스라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평화의 결국은 한반도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현재 여겨지니, 이것은 트럼프의 의도와 정반대로 진행되니, 강대국의 판단(얄타회담)과 전혀 다른 남북의 평화가 도래하였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내 삶속에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신 일들을 다시 찾아내서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일주일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