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당시 로마는 지금의 유럽과 흡사하다. 가장 문명이 발달한 지역, 그곳에는 보이는 욕정이 화산처럼 폭발하던 곳이다. 사람이 동물처럼 정글을 형성해서 군대권력으로 탐욕을 다스리는 시대였다. 특히,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호모와 게이가 난무했던 시대였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하다. 성소수자로서 지금은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이 합법으로 규정된 시대가 되었는데, 로마서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서 어긋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상대적 짝이 되어서 결혼하도록 했는데, 남자가 남자와 사랑의 짝이 되어 결혼하는 것은 순리가 아니다. 로마서 1장 후반부에 이러한 내용이 등장한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들의 문화를 아주 쉽게 설명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즉, 로마서는 이방인들의 신앙입문서이다.
첫째, 사도바울은 자랑스럽게 ‘복음’의 가치를 높게 들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도바울의 자랑스러움, 성경을 통해 읽는 텍스트로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의 느낌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지금 시대에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가 그때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다. 그때는 부끄러웠다. 그 시대에는, 특히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그 시대에는 예수님이 사형수였으며, 기독교는 세상속에서 흡혈귀처럼 사람의 피를 마시는 식인종교로 알려졌다. 포도주를 피로 상징해서 마시는 성찬식이 오해받은 것이다. 복음은 당연히 부끄러워할 일이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복음을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도바울이 정의하는 자신이 믿는 구원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로 고백하고 있다. 즉, ‘다윗의 혈통과 부활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표징이다.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福音)은 복을 주는 소리다. 복된 소리가 바로 복음이다. 잘될 것이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누가 그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장이 “잘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대통령이 “잘 될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그와 같이, 근본자 하나님께서 보낸자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근본된 영혼의 축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약시대에 복음의 전달자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으로 비쳐서 어둠이 물러가고,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은 어둠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혜택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지금도 동일하다.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복음으로 자유함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마음의 세계에 먼저 해당되고, 이후 행실로서 생활을 살아내면 자신의 주변삶이 달라지게 된다. 생활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습관을 바꾸면 여명이 밝아져 아침이 되고, 점점 대낮이 찾아오듯이 생활은 보다 윤택하고 아름다워진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을 내버려둔다. 쓰레기를 버려두듯이 어쩔 수가 없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사람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곧 불의다. 불의는 의로움의 밖에 머문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자들은 그 법의 보호를 받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법의 밖에 위치함으로 이미 갇히게 된다. 빛의 행실을 하는 자들은 그 행실로 말미암아 빛속에 거하고, 어둠의 행실을 하는 사람들은 그 행실로 이미 어둠에 속하는 것이다.
“나의 마음에 그 중심은 무엇이 있는가”
태양계의 중심은 태양이다. 중심으로 그 세계는 이름이 정의된다. 하나님의 사람은 곧 하나님을 중심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중심이 ‘자신’이면, 그것은 ‘자신’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과거, 故노무현 대통령이 “나는 문재인의 친구”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관계성으로서 서로의 존재를 표시하는 것이다. “누구의 누구”는 관계와 의미로서 존재세계이다. 자신의 중심에 과연 누가 존재하는가? 무엇이 중심하는가? 자신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항상 주의깊게 들여다봐야한다. 성경을 멀리하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멀리 있다. 성경을 가깝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가깝게 있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데, 말씀을 가깝게 하면 곧 하나님과도 가까운 법이다. 사람도 가까운 사람과 말을 많이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가까운 것이다. 결국, 자신의 생활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자주 가깝게 하고, 행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느냐로 의로움과 불의가 좌우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고, 그 생활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를 싫어하고, 그 습관에 하나님의 법을 실천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싫어함으로 이미 버려둠을 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스스로 살펴보면,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하게 순복하는 자는 그 순복함으로 이미 하나님의 법속에 거하고, 불복하는 자는 불복함으로 법밖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