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창세기 4장은 선악 구도이다. 먼저 태어난 장자, 가인과 나중에 태어난 차자 아벨이 있었다. 이들의 직업은 달랐다. 가인은 농부, 아벨은 양치기였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는 장면이 나온다. 창세기 4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지 않은 사람은 가인이고, 제사를 받은 사람은 곧 아벨이다. 직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약 직업과 관련이 있었다면 가인이 하나님께 불만을 품었을 때, “가인아, 너의 직업을 바꾸라”고 권면했을 것인데, 하나님은 “죄를 짓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즉, 죄를 지어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항상 가인과 아벨로 나뉘어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가인은 먼저 권력을 잡은 기득권이 될 때가 많고, 아벨은 힘없는 사회적 약자일 때가 많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유대교는 로마앞에는 사회적 약자였으나, 예수님앞에는 강자였다. 유대교는 가인의 입장이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듯이 유대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서 죽여 버렸다. 항상 시대는 하나님의 보낸 자들을, 선지자들을, 시대의 뜻있는 선각자들을 죽여 버린다. 기득권의 피묻은 돌에 힘없이 죽어가는 아벨의 피가 호소함으로 때론 촛불을 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땅에서 육신이 죽게 되면, 육신이 없는 아벨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더불어 가인도 그 지역에서 쫓겨나게 된다. 새로운 셋이 태어나서 가인가정의 뜻을 이어받게 된다. 항상 역사가 그러했다. 유대교가 예수님을 죽이니, 뜻은 400년후 로마로 넘어갔다. 본래는 이스라엘에 교황청이 들어서서, 초대교황은 예수님이 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가 진행된 것이다. 가인과 아벨도 그렇다.
창세기 4장에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할 것은 부모의 유전자이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하나님의 법을 범하여 아담과 함께 선악과를 따먹게 되니, 천법을 범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득남하여 얻은 가인의 유전적 형질은 형제를 시기하고, 분노하는 ‘분노조절 장애 유전자’가 존재한 것이다. 법을 인내하고 참았다면 자식도 그러한 성품을 닮았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자녀가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력을 좋아하는 자식이 된 것이다. 결국 아우의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지니, 거기에 분노하면서 몰래 아우를 죽인 형의 횡포는 ‘가정폭력’의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가정에서 살인을 일으켰으니, 아담의 가정은 폐허가 된 것과 다름없다. 민주주의 사회였다면 가인은 검찰에 기소되어서 살인죄로 평생 감옥에 있었을 것이다. 살해동기가 명백할 뿐만 아니라,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우를 죽인 죄값을 감옥에서 받지 않고 동쪽 마을로 이사해서 가정을 이뤄 살아가게 된다. 그 시대로서 고향을 벗어나는 감옥의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인의 후예중에도 라멕이란 사람은 ‘소년을 죽였다’는 말이 나온다. 자신의 자녀를 죽인 것인지, 혹은 다른 소년을 죽인 것인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자신의 조상 가인을 비유해서 77배의 벌을 받을 것으로 스스로 후회하는 대목을 보면, 가정폭력의 사건으로 추정된다. 하와가 저지른 범죄가 가인으로, 라멕으로 흘러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유를 노래하고, 자신의 즐거움을 주장하지만, ‘자신의 유전자’가 사실은 후대로 흘러가므로, 자신의 것이 자신의 것만은 결코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후대인들도 함께 사용함으로 공유되는 자신이다. 결국, 그 책임이 막중하다. 가인이 가인으로 태어난 것은 그 부모의 책임이 크고, 가인이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다스리지 못함으로 살인을 저질러서 아우를 죽인 범죄자가 된 이후에 그러한 DNA가 그의 후세로 이어져서 라멕과 같은 인물이 태어나게 되었으니 그 또한 조상의 책임이 크다. 지금, 나의 삶, 지금 나의 생각, 얼마나 하나님의 법으로 살아가는지 스스로 점검해볼 때이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받아드려지지 않으므로 ‘안색이 변했다’. 하나님은 그 때 가인에게 물었다. “너가 안색이 왜 변하느냐?”고. 안색이 변한다는 것은 마음에 변동이 생겨서 불편하다는 것이다. 물론, 아우의 제사는 받아드려지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드려지지 않아서 비교가 되는 것은 마땅하다. 친구는 1등을 하고, 자신은 꼴등을 해서, 서로 비교가 된다면 그것은 마땅하다. 그렇다고 1등을 한 친구가 미우면 될까? 친구는 어떻게 1등을 했는지 그 방법을 알아서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뉘우쳐서 친구의 방법으로 자신도 행해서 성적을 올리면 된다. 자신과 비교해서 1등을 한 친구가 너무 미워서 친구를 왕따를 시킨다면 그 또한 학교에서 가인과 같은 인물이 될 수 밖에 없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그 사람을 ‘다름의 차별’로 구분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인과 같은 족속이다. 비교해서 다를 때, 그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주는 것, 그것이 화목의 시작이다. 가인도 충분히 형의 입장에서 동생의 잘함을 칭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벨은 양치기이고 가인은 농사꾼이니, 아벨은 농사짓는 법은 알지 못한다. 농사짓는 것에서는 가인이 최고일 수 밖에 없다. 서로 모든 것을 잘하는 것이 아닌데, 가인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형으로서 형답지 못하게 약한 동생을 돌로 쳐서 죽였으니, 그러한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