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할례(割禮)는 포경수술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표징으로서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이다. 할례는 약속의 징표와 같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커플링을 끼면서 사랑을 확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커플링을 날마다 끼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연인이 있다고 하자. 남자는 커플링에 커플티까지 맞춰서 여자와 사랑을 약속했다. 그런데, 그 커플링을 끼고서 커플티를 입고서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 양다리를 걸치면서 사랑을 자유연애로 즐긴다면, 그 자유연애를 들키든, 들키지 않든, 커플링의 효력은 상실된 것이다. 할례가 바로 그와 같다. 할례를 한 근본은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면서 유대인답게 살아가기 위한 징표와 같다. 할례 자체가 어떤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포경수술은 단지 몸에 상처를 냄으로서 감각을 무디게 하면서 자녀번성에 보다 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 외에 생물학적 효력이 무엇인가? 없다. 할례는 표면에 행하는 ‘의식’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끼리 몸에 문신을 하는 것과 흡사하다. 문신을 하는 근본은 그 사랑이 영원히 변치 말자는 언약이다. 사랑이 변했다면, 사랑을 약속한 문신은 배신의 증표가 될 뿐이다. 로마서 2장은 그것을 역설하고 있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자랑하는 자들이 율법을 몰래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면, 할례를 받은 그 특권은 상실되고 무할례자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할례자는 곧 하나님의 입장이다. 유대교에서 할례를 받은 자들이 누리는 특권은 제도적 측면에서 쉽게 사라질 수는 없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대제사장들이 그 직분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이미 그들은 유대인의 특권조차 사라졌고, 민족의 운명이 기울어졌다.
우리가 항상 주의해야할 부분이다. 선민의식(選民意識)은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 매우 중요하다. 해병대가 해병대 제복을 입고, 특공대가 특공대 군복을 입고서 자긍심을 맘껏 자랑하듯이, 선민사상은 특권의식을 제복처럼 보여하면서 게르만 민족이 가졌던 2차 세계대전의 정신무장처럼 잠재능력을 최고점으로 표출한다. 그런데, 그 자긍심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국제사회에서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면서 폭력으로 둔갑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긍심도 좋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양심을 시키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율례를 준수하고, 하나님의 의향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듯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상식의 범주인데, 해병대 제복을 입으면 해병대의 특권의식이 생기는 것처럼 사상의 제복은 무섭다. 그러나, 경계하고 벗어야할 첫 번째 편견일 뿐이다. 평상복으로 제복을 입는 경우는 없다. 군인들조차 집에서는 제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누구가 삶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
할례를 받은 자가 율법을 범하면 무할례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듯,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가 되는 것도 이치에 맞다. 할례자들은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할례의 본질이 율법의 준수에 있지, 아브라함의 혈육적 후예에 있지 않다. 아브라함의 혈육이 하나님의 전통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아브라함은 어떤 혈통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자부할 것인가? 모든 택함은 택한 자의 손길에서 좌우되는 것이지, 땅의 혈육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앙세계가 어디 북한의 김일성 일가에 비유할 수 있는가? 북한통치제제는 세습으로 여전히 혈육에 의해 권력이 넘겨지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결코 그렇지 않다.
누가 권사이고, 누가 장로이고, 누가 성직자이고, 누가 집사이고, 누가 목사인가? 누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진실한 신앙인인가? 표면적 무늬에서 좌우되지 않고, 이면적 내용에서 좌우되는 법이다. 누가 진실한 저널리스트인가? 누가 판사인가? 누가 검사인가? 누가 정치인인가? 모든 직업군에 적용되는 본질을 묻는 물음표이다. 사도바울은 본래 국회의원 출신으로서, 요즘 전쟁의 핵심지인 시리아 근처 다멕섹에서 극적으로 돌이켜, 예수님을 평생 증거하면서 살았던 사도이다. 보여지는 것을 좋아하는 정치인으로서, 그가 설파한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다’는 문장은 울림의 강도가 클 수 밖에 없다. 그는 율법전통주의 학파인 ‘가말리엘 문하’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상당히 알아줬던 출신을 가졌던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서울대 출신, 연대 출신, 하버드대 출신”과 같은 명예다. 그러한 명예를 가진 자로서, “표면적 유대인”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지는 선언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서 살았으며,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무늬만 있다고 모두 그 일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꿩 잡는 것이 매”라는 그 격언처럼,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속에서 실천하면서 인격을 완성하는 것임을 말씀으로 확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