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보는 4가지 관점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성경(聖經)은 성스러운 경전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의 손을 통해 기록한 하나님의 역사이며, 섭리의 증거이다. 모든 교육의 기본체계는 교과서를 통해 전달되듯, 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전달된다. 성경은 곧 뜻의 화석이며, 하나님의 심령이 담긴 일기장이고, 인류를 향한 사랑의 편지이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담고 있는 책의 으뜸이다.
나는 이 성경을 고등학교때, 지금의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목사님의 교육을 받은 어떤 전도사에게 배웠다. 이후 국민대학교에 입학하고, 정명석 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듣고, ‘이웃사랑과 청년의 긍정적 가치관’을 멘토링받고, 사회를 보다 미래지향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죽음 이후에 펼쳐질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의 소망을 품게 되었다. 해병대 시절, 잠시 신앙의 혼돈기가 찾아왔으나, 전역하고 IMF를 거치면서 나는 고등학교때 강한 충격으로 배웠던 그 말씀을 뿌리삼아 신앙생활을 유지했다.
TV를 통해, 특히 그것이 알고싶다는 프로그램을 통해 내가 속한 단체가 매도당했다. 내가 목격한 것과 그들이 묘사한 것은 너무 차이가 심했다. 토끼를 고슴도치라고 하면 등치가 얼추 비슷하니, 그런가? 그 입장도 들어보겠는데, 토끼를 늑대라고 하고, 코끼리를 개미라고 하면서, 궤변을 늘어놓으니, 과연 그들이 짜깁기한 영상물은 히드라보다 무서운 형상이라, 어쩌면 그들의 내면이 폭로된 것이 아닌지, 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나는 눈이 없고, 귀가 먹었나?
PD저널리즘을 나는 증오하고, 경계한다. 검찰은 증거를 찾아서 죄인을 만드는 법의 기술자인 반면, PD는 없는 증거를 편집으로 창조하는 영상검찰이다. 증거의 유무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보여지기 위한 설정이다. 그것이 알고싶다는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PD수첩이 우리 단체를 비롯해서 다양한 사회고발 사건을 폭로했으나, 선정적인 내용이 다분하였고, 광우병 사태에 대한 그들의 보도는 대법원에서 ‘허위보도’라는 주홍글씨가 씌여졌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싶은 것만을 보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아는 수준으로 인식하고, 편견의 눈동자로만 판단한다는 뜻이다. PD가 그러한 인간심리를 역이용하고, 사람들도 그러한 심리를 활용하면서 살아간다. 포장술은 심리를 자극하여 내용물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광고도 동일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이 그렇다고 인식하여 믿으면, 다른 어떤 정보가 들어가도 쉽게 인식을 바꾸지 못한다. ‘동무’라는 말이 참 좋은 표현인데도, 북한의 공산주의라는 오명이 씌워지니,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
어떤 사건, 어떤 뉴스, 어떤 책, 어떤 음식점에 대한 편견은 아주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나지만, 만약 영혼의 구원과 직결된 사람과 사건을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것은 역사적 책임이 뒤따른다. 2천년전 산헤드린 의원들이 합심하여, 청년 예수를 저녁에 긴급체포하고, 이튿날 새벽에 잠자는 빌라도를 깨워서 로마법으로 사형판결을 받아내, 형을 바로 집행한 그 사건은 인류역사의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일제의 만행처럼,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을 수식하는 영원한 주홍글씨다. 그 판결이 과연 정의롭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온전했는가?
왜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앞세워, 하나님의 사람을 귀신의 왕이라고, 자칭 그리스도라고, 거짓 선지자라고 판단했을까?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무지에 담대함을 부여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모두 관점의 오류에서 발생한 역사의 참극이다. 모르면, 자신을 돕는 베필도 살해한다. 무지는 구원자도 못박는다. 알면, 원수도 관용으로 포용하고, 적도 여동생으로 이해하고 생명을 얻는다.
내가 성경을 보는 관점 4가지를 저술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어린시절 배웠던 그 말씀을 다시 되새기면서, 다시 나의 생활속에 찾아오는 다양한 편견들을 발견하면서, 녹슨 신앙의 습관을 다시 갈고 닦아야겠다고 다짐했다. 3천권 넘게 책을 쓰면서, 글쓰는 재주가 달팽이가 배추잎속에서 4달 넘게 살아갈 정도로 깊어졌다. 나의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를 드리며, 이제는 나에게 필력을 선물하신 나의 하나님을 위해 글을 써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하였다. 이 책은 이런 배경에서 출발한다.
우선, 성경을 보는 관점 4가지를 배우기전에, ‘성경’(聖經)을 제대로 인식해야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된다. 구약(舊約)은 옛날 약속이고, 신약(新約)은 새로운 약속이다. 유대인은 구약만 있고, 천주교와 기독교는 구약과 신약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이 유대교 경전을 ‘구약’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기점은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누가 집필했는가? 첫째, 사람이다. 둘째, 하나님이다.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집필하신 책이 바로 성경이다. 구약의 모세 5경은 모세가 썼다고 성경학자들이 이야기하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논쟁이 있다. 창세기를 도대체 어떻게 모세가 썼다는 것인가? 기존의 역사책이 존재하였고, 그것을 토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완성한 것이 창세기이지, 모세가 시내산에 들어가서 창세기를 썼다고 주장한다면, 모세를 소설가로 매도하는 것밖에 안된다. 모세는 소설가가 절대 아니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있었고, 그것이 족보와 함께 전승되면서, 모세가 집대성한 것이다.
구약의 상당부분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서술했다. 마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삼국시대의 역사를 서술하고, 한국사가 한국의 근대사를 포함한 역사를 서술하듯 그렇다. 그런데, 왜 세계는 삼국유사를 탐독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다. 성경을 펼치는 목적은 그곳에 하나님이 어떻게 활동하고, 인류역사에 무엇을 원하고, 어떤 인물이 신앙적으로 성공하고, 어떤 인물이 결국 실패하는지 깨달아 알고, 독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소설처럼 재미로 읽으면 안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사실, 명심보감(明心寶鑑)이란 책만 보더라도, 마음을 밝게 비추는 보물같은 거울로서 그 책은 사람의 양심과 성격을 고치게 하는 효과가 있다. 명심보감도 그러한데, 하물며 성경은 양심과 그 영혼까지도 거울에 얼굴이 비추듯 보이지 않겠는가? 자세히 관찰하면, 자신의 미래가 훤히 드러난다. 스스로 알고, 모순을 고치면, 완벽(完璧)에 이를 것이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提摩太後書 3:15~17 並且知道你是從小明白聖經.這聖經能使你因信基督耶穌有得救的智慧。 聖經都是 神所默示的、〔或作凡 神所默示的聖經〕於教訓、督責、使人歸正、教導人學義、都是有益的. 叫屬 神的人得以完全、豫備行各樣的善事。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約翰福音 1:1 太初有道、道與 神同在、道就是 神。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에 이끈 영도자이다. 모세는 정치인으로서 전쟁을 이끈 영도자였다면, 여호수아는 군인으로서 정치인으로 활동한 영도자였다. 지금 시대로 말하면, 대통령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은 모세였고, 그 뒤를 이어받은 인물이 바로 여호수아다. 지금으로부터 3천년이나 오래된 시대인데, 권력을 가족에게 물려주지 않은 것을 보면, 당시 신앙공동체가 특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하튼, 모세는 40년 장기집권했고,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을 악평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생활을 했고, 그 형벌기간이 끝나고 여호수아는 드디어 가나안 탈환을 하나님께 허락받는다. 하나님의 마음이 새롭게 변하는 것은 헌법수정보다 힘들다. 40년간 하나님은 가나안의 문을 절대로 열어주지 않았다.
여호수아 1장을 읽어보면, 여호수아가 모세의 권력을 넘겨받은 배경이 비서실장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비서실장을 수행하면서, 여호수아는 모세의 신앙철학을 그대로 전수받았고, 삶속에서 하나님을 진실로 섬겼다. 날마다 율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대화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군인으로서, 어쩌면 무력이 앞서고, 자기 주장이 상당히 강할 것 같은데, 여호수아는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관점을 우선시했다.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첫 번째 덕목은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는 습관이다.
여호수아 1:7~8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約書亞記 1:7~8 只要剛強、大大壯膽、謹守遵行我僕人摩西所吩咐你的一切律法.不可偏離左右、使你無論往那裡去、都可以順利。 這律法書不可離開你的口.總要晝夜思想、好使你謹守遵行這書上所寫的一切話.如此你的道路就可以亨通、凡事順利。
◆ 관점은 무엇인가?
관점(觀點)은 보는 지점(點)이다. 어디서 보느냐로 경치가 달라지고, 그림의 해석도 달라진다. 사람도 앞에서 보면 얼굴이 보이고, 뒤에서 보면 뒤통수가 보이고, 옆에서 보면 옆얼굴이 보인다. 사진은 찍는 각도가 사람의 모습을 결정한다. 멀리서 촬영하는 것과 근접촬영하는 것은 같은 물체라도 전혀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관점(觀點)은 이처럼 보는 지점이다.
관(觀)은 황새 관(雚)과 볼 견(見)이 합쳐졌고, 見은 사람의 눈을 크게 그린 모습이다. 目, 見, 觀은 모두 ‘본다’는 의미이지만, 모자와 면류관이 다르듯 품격이 다르다. 見은 눈으로 그냥 보는 것이고, 觀은 황새가 보듯 세밀하게, 깊게, 보는 것이다. 그냥 대충 훑어보는 것은 절대 관(觀)이 아니다. 미술관에서 슈퍼 물건 집듯 작품을 관람하면 절대로 안된다. 작품으로 작가를 만나듯 깊게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관람(觀覽)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에서도, 성경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깊게 묵상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기독교복음선교회의 수련원이 위치하고, 대전의 관광명소로 유명한 진산 근방 월명동에는 세계적인 돌조경 건축물이 위치한다. 돌과 돌이 맞물려, 건축기술의 신비함이 깃들인 그 조경물은 소나무와 오석(烏石)과 형상석들이 산처럼 세워졌다. 피라미드가 이집트 노예들의 고통으로 세워졌다면, 월명동은 정명석 목사님과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원봉사와 헌신으로 건축한 미래형 자연성전이다. 나도 대학시절 자원봉사로 함께 했다. 지붕없이 조망권은 대둔산과 인대산이 멀리 내다보인다. 앞산에 올라서면, 보는 사람의 시야가 창문이다. 그곳을 방문하면 즐겁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곳에 코끼리 바위가 있다. 한동안 두꺼비 바위라고 알려졌는데, 나는 그 바위를 보면서 “두꺼비가 참 크다”라고 생각했다. 어느날, 돌의 조예가 깊은 사람이 월명동에 방문해서, 그 바위를 보더니 “코끼리 바위 형상석으로 놀라운 작품이다”고 깨달았다. 전문가는 보는 관점이 달랐다. 두꺼비로 보는 관점에서는 두꺼비로 보여지는 위치였고, 코끼리 바위는 세로의 좁은 관점에서 봐야 보여지는 형상이었다. 그 전문가의 눈을 통해서 두꺼비 바위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코끼리 형상석으로 대변신을 할 수 있었다. 두꺼비 바위조차 자신의 잠재능력을 몰랐을 것이다. 이처럼 관점이 무섭다. 두꺼비 바위였을 때는 사람들이 쳐다보면서도 인정을 잘 안했으나, 코끼리 바위가 되니, 정말로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월명동에서 상당히 인기있는 형상석이다.
성경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로 구원의 감동과 해석의 차이가 발생한다. 문학작품도 읽고 해석하는 방법이 있듯이 성경도 이해하는 관점이 매우 중요하다. 소설책 읽듯이 재미로 보면서 덮거나, 신문의 제목만 읽듯 속독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구원을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취급하는 맹점에 빠질 수 있다.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된다.
1) 성경은 비유다.
성경이 비유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롯해서, 성경 곳곳에 적혀 있다. 비유는 하나님도 즐겨쓰고, 문학인들도 좋아하며, TV 연예인들이나 언어를 즐기는 사람들의 기본화법이다. 비유는 특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듯 비유는 표현을 돋보이게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장이 비유인지, 어떤 사건이 비유인지, 무엇을 비유해서 비밀을 감췄는지, 그것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물은 항상 바위밑이나, 나무껍질 속에 숨겨있듯, 비유를 벗기면 하나님의 은밀한 비밀이 드러난다. 비유로 성경을 이해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마태복음 13:34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馬太福音 13:34 這都是耶穌用比喻對眾人說的話.若不用比喻、就不對他們說甚麼.這是要應驗先知的話、說、我要開口用比喻、把創世以來所隱藏的事發明出來
에스겔 20:49 내가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
以西結書 20:49 於是我說、哎、主耶和華阿、人都指著我說、他豈不是說比喻的麼。
2) 성경은 시대성이다.
성경은 글로 적혀 있다. 성경이 만약 화석으로 만들어졌다면, 시대성을 논할 필요는 없다. 자연은 시대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반면, 글은 시대성의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태풍의 눈은 평온하여도 그 세력의 영향권에 속하듯, 글로 적힌 모든 기록은 그 시대에 속한다. 시대성은 중력과 같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으며, 그 힘으로 존재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시대의 중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문화권에 속해 있고, 보이지 않는 문화의 공기를 모두 마시면서 살아간다. 가령 누군가 “아메리카노”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한방약 색깔의 진한 커피”를 의미함을 인식한다. 또 누군가 “초콜릿”을 선물했다면, 그것은 “사랑해”를 담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세종대왕에게 “아메리카노”라고 말하면, 알까? 조선시대에 과연 초콜릿을 사랑의 매개체로 선물했을까? 그 때는 오히려 엿이나, 인절미, 혹은 다른 상징물을 활용해 사랑을 전달했을 것이다. 이처럼, 시대마다 풍습과 문화는 달라지면, 사회공동체에 살아가는 사람은 그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는 순간, 사람은 추방당하고, 기록에서 삭제된다.
성경도 동일하다. 모세가 아무리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율법과 말씀과 역사를 기록하였다고 해도, 히브리 민족의 당시 글자가 문화의 영향권에 속해 있으니, 시대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시대성이 있어서, 그러한 기록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기록되는 것이 타당하므로, 시대가 흐른 지금, 그 사건을 읽는다면, 시대성의 옷을 재해석해서 이해를 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 드라마를 통해 자세히 드러난다. 우리가 역사 드라마를 정말로 재밌게 시청하는데,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고 착각한다. 배우들이 그렇게 말하니, 그런 줄로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언어가 완전히 달랐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70%는 일본이 만든 것이다. 식민지 치하의 잔유물이 언어로 남겨진 것이다. 싫든, 좋든, 우리는 일본이 만든 단어를 사용한다. 거의 모든 단어가 그렇다. 일본 총독부 건물은 허물수 있어도 일본이 만든 언어는 절대로 바꿀 수가 없다. 이미 한국인의 사고속에 고정된 언어를 어떻게 삭제할 수 있겠는가? 이것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문장과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이 완전히 다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정말로 조선시대 문장으로 드라마가 방영되면, 외국영화를 보듯 밑에 자막이 쓰여야할 것이다. MBC도 KBC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 당시 문화를 상징하는 몇가지 단어와 옷, 풍습으로 역사를 재현할 뿐, 나머지는 현대적 표현으로 모두 바꿔서 시청률을 끌어올린다. 세종대왕 시대를 연출한다면, 무엇보다 신경쓸 인물은 세종대왕이 아니고, 독자이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이미 죽어 무덤속에 묻혀, 그 형상을 닮은 동상은 항상 같은 표정으로 불탄 숭례문만 쳐다볼 뿐이니, TV는 지금 사람이 봄으로 고대언어는 지금의 입장으로 바뀌는 것이다. 성경도 동일하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가령, 아담의 이야기를 읽는다고 하자. 그 아담이 어디 살아있는가? 그는 죽어, 흙이 되었다. 아담의 사건을 우리가 지금 읽는 근본 목적은 아담가정의 추락과 가정폭력을 정확히 이해함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이다. 실존인물 아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럼으로, 아담의 사건을 접하는 우리는 그 시대가 청동기 시대였음을, 메소포타미아 근처 문명권에 속했음을, 부족사회였음을, 토테미즘이 발달했던 원시 종교사회였음을, 과학은 미개한 상태였음을, 철기문명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가축과 농경생활이 비로소 시작되던 시기였음을, 인정해야한다. 이것이 시대성을 인정하고 성경을 읽는 관점이다.
3) 성경은 종교적이다.
성경은 반드시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해야한다. 수필은 신변잡기로서 생활속에 발생하는 사소하나 중요한 사건을 글로 표현한다.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문학장르가 수필이다. 성경은 수필이 아니다. 성경은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종교적 관점은 ‘영혼’을 의미한다. 세상적 책들은 상당수 경제를 어떻게 부유하게 하고, 남는 돈을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혹은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알고 있는 지식을 어떻게 잘 전달할지, 사람이 살아가는 지혜에 대해 설명한다. 성경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오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경은 영혼을 위해 인생이 어떻게 살아갈지, 그 방향을 제시한다. 성경을 읽을 때는 신앙적 측면에서 이해해야지, 세상의 관점으로 ‘경제적 성공’과 ‘권력의 쟁취’로 이해하면 안된다.
가령, 야곱이란 인물이 있었다. 형 에서보다 약간 늦어서 동생이 된 억울한 인물, 빠름이 금메달이면, 야곱은 언제나 은메달이었다. 그가 이삭의 축복기도를 받았는데, 이후 형의 협박을 받고,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과연, 세상적 관점에서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삭의 축복기도가 저주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신앙적으로 이해를 해야만 오해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삭의 축복기도를 받고서, 야곱은 비로소 독립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뜻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형의 협박을 받았으나, 부모와 떨어져 삼촌 집에서 월급도 받지 않고 목장일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지만, 야곱은 그곳에서 결혼의 짝을 만났고, 자녀를 얻었고, 경제적 부유함을 얻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의 생각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찾아온다. 그것은 겨자씨처럼 사소한 틀어짐으로 시작된다. 쫓겨난 것 같았으나, 뜻의 길로 갔던 것이다. 에서는 오히려 부모의 가업을 자신이 독차지한 것 같았으나, 훗날 이룬 업적은 그럭저럭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그렇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소서라고 기도했던 예수님은 은신처가 발각되어 변호사도 없이 재판을 받다가 십자가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과연, 현실적 이익을 따지는 관점에서 그러한 무모함을 납득할 수 있는가? 죄가 없으나 정치권력이 죽이려고 하니, 아주 멀리 도망을 갔어야 마땅하지 않는가. 최소한 사마리아 땅으로 피했더라면….. 앗수르 지방으로….. 그리스 지방으로…..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십자가를 숙명으로 받아드렸을까? 베드로에게조차 “검을 도로 넣으라”고 했으니, 왜 경호원을 옆에 두지 않았을까? 다양한 변명이 펼쳐진다. 이것은 육적인 관점이다. 성경은 영적인 관점에서도 해석해야한다. 즉, 흑암과 마귀가 영적으로 믿는 제자들을 유혹하고, 그 시대 중심종교였던 유대교 지도자들을 유언비어로 물들여서, 예수님의 선교활동이 벽에 부딪힌 것이다. 정치인들이 막아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근본은 흑암이 정치인들을 통해서 막은 것이니, 예수님은 결사항쟁의 심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겟세마네에서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영적인 전쟁, 즉, 아마겟돈 전쟁으로 이해를 해야지, 성경적 사건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됨을 알 수 있다.
4) 성경은 묵시(默示)와 계시(啓示)다.
묵시(默示)는 침묵으로 보여주는 것, 계시(啓示)는 열어서 보여주는 것이다. 누구든, 정보를 알려줘야 그 내막을 알 수 있다. 어떤 단체의 내부 비밀이 외부로 폭로될 때는 반드시 내부의 밀고자가 존재한다. 아는 자가 말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만이 알고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성령이 그 사정을 이해하며,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이 소통하는 언어는 묵시와 계시이다. 한국인은 한국어로 소통하고, 시대를 초월해 김소월이나 윤동주는 지금 우리와 문학작품으로 소통하고, 미켈란젤로나 피카소같은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 소통한다. 소통의 매개체가 모두 각각이다. 하나님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데, 우리가 한국어로 말하듯 그렇게 말씀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 대화하듯 하지만,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상징의 언어로 사용해서 각 사람에게 보이신다. 사도바울이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羅馬書 1:20 自從造天地以來、 神的永能和神性是明明可知的、雖是眼不能見、但藉著所造之物、就可以曉得、叫人無可推諉.
하나님은 만물의 언어를 사용하신다. 성경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했는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가령, 에스겔 선지자는 어느날 백성들앞에서 급하게 이삿짐을 꾸려 떠났다. 그 사건은 상징적 계시였다. 바벨론으로 그처럼 끌려서 포로생활로 떠난다는 묵시였다. 예레미아 선지자는 환상으로 가마솥이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전쟁의 시작임을 인지했다. 가마솥이 엎어진 것은 부엌에서 밥할 때 주의하라는 의미가 아니고, 상징적 계시로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도 마지막 만찬에서 모세의 유월절을 기념하면서, 포도주와 빵을 제자들과 함께 나눠 마셨다. 저녁식사를 한 것인데, 누가복음에 보면, 포도주는 피로서, 떡은 살로서 비유하면서 제자들에게 나눠준 것을 알 수 있다. 평범하게 먹고 마시는 일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진 것이다. 바다의 깊이를 헤아리듯, 묵시와 계시를 생활속에서 깨닫는 훈련을 해야한다. 외국어도 외국인과 자꾸 대화하면서 듣는 훈련을 해야지, 귀의 감각이 생기듯이, 하나님과도 기도로 말하고, 묵시와 계시로 깨닫는 훈련을 해야만, 생활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누가복음 22:14~21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위에 있도다
路加福音 22:14~21 時候到了、耶穌坐席、使徒也和他同坐。 .耶穌對他們說、我很願意在受害以先、和你們喫這逾越節的筵席。 我告訴你們、我不再喫這筵席、直到成就在神的國裡。耶穌接過杯來、祝謝了、說、你們拿這個、大家分著喝。 我告訴你們、從今以後、我不再喝這葡萄汁、直等 神的國來到。 又拿起餅來祝謝了、就擘開遞給他們、說、這是我的身體、為你們捨的.你們也應當如此行、為的是記念我。 飯後也照樣拿起杯來、說、這杯是用我血所立的新約、是為你們流出來的。 看哪、那賣我之人的手、與我一同在桌子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