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교회 식사 준비 봉사 사역에 동참했다. 봉사(奉事)는 섬기는 일이다. 정치적 개념으로 ‘공무원’과 ‘벼슬’에 해당한다. 공무원은 공적인 의무를 담당하는 관리이며, 국가를 위해 일하는 모든 사람이 바로 공무원이고, 봉사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말씀과 섬김의 사역을 맡은 성직자(聖職者)가 있고, 성도(聖徒)는 거룩한 사도의 모임으로서 모든 신앙인들의 직분이다.
행위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은 햇살이다. 계시록에도 인자의 다리에 충신과 진실의 이름이 써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다리는 곧 행함의 상징적 표현이다. 행함은 곧 그 이름이다. 만물은 열매와 이름에 혼동이 없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는 이름에 혼동이 자주 발생한다. 이름에 속지 않으려면 그 행함을 이름으로 판단하면 된다. 내 자신이 신앙인의 이름을 갖고 있다면, 신앙인의 삶을 살면 된다. 하나님께는 그 행함이 이름으로 불린다.
오늘 봉사 사역에 동참하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에서 내가 뭔가를 한다는 뿌뜻함, 마치 세포가 되어서 양파를 까고, 감자를 다듬고, 도란도란 여자 집사님들의 반찬 준비에 도우미가 된다는 것이 즐거웠다. 내 고향에서도 어머니가 항상 부엌 살림을 맡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것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어머니의 따스함이다. 밥공기에서 모락모락, 굴뚝에서 모락모락 내 고향과 모두의 고향은 어머니가 식사를 맡았다. 전기밥솥이 굴뚝을 대신해도 어머니는 늘 가족의 건강을 먼저 챙긴다. 교회 성도들의 건강과 식사를 챙기는 여자 집사님들의 손길이 그와 같음을 깨닫는다. 토요일, 모두 바쁘겠지만, 기꺼이 시간과 마음을 합해서 내일 점심을 준비하는 일은 거룩한 사역임에 틀림없다.
밥 먹는 일은 때론 신앙적 의미에서 뜻있는 일이다. 밥은 늘 영혼의 양식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40일 금식기도를 한 예수님께 흑암이 첫 번째 냈던 시험문제도 밥문제였다. 그때 예수님은 밥을 ‘말씀’으로 막아냈다. 밥보다 말씀이다. 육신에게 밥이 곧 영혼에게 말씀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마지막 만찬에서도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고 골고다 언덕을 가셨다. 부활후 정신을 못차린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로 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에도,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조반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반은 아침밥이다. 부활후 예수님은 제자들과 생선반찬에 아침밥을 먹고 결별했다. 밥먹는 일은 결국 신앙의 일이니, 오늘 식사준비 사역에 함께 한 것이 새삼 새롭다.
어떤 남자 집사님은 자세가 제대로 갖춰졌다. 평소 집안에서 아내의 살림을 도와주는 남편인 것으로 보여진다. 집안살림을 남편이 돕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고, 사소한 일까지 몸짝 붙여가면서 일하는 열정은 음식이 맛있게 향기로 익어간다. 감자 까는 일이 의외로 어렵다. 나는 껍질만 벗겼다.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줄 알았더니, 깐 감자를 씻고, 그 감자를 4등분 하고, 마지막으로 ‘돌려 까기’로 마무리를 한다. 돌려 까기가 압권이다. 4등분한 감자의 모서리를 살살살 돌려서 까는 것이다. 내가 친구와 함께 감자 100개 정도의 껍집을 벗겼으니 돌려 까기는 400개를 해야한다. 슬슬슬 손목을 움직이면서 정성을 다하는 성도들의 식사 준비 모습을 보면서, 나는 양파껍질과 감자껍질을 쓸어 담은 비닐 봉투를 들고 밖에 먼저 나왔다.
오늘도 교회 봉사 사역에 동참한 것이 마음 뿌뜻하다. 봉사는 시간이 있든, 없든, 작은 일에 함께 마음을 합하여 협력하는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