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불(火)이 없다면, 이 세상과 인류문명은 발전할 수 없었다. 어제, 까페에서, 좋은 사람들과 성경을 토론하는 만남을 가지게 되었고, 나도 동등한 좌석에 앉아서 경청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고등학교때 신앙에 입문하여 사인곡선처럼 기복(起伏)이 심했던 삶이었으나 깊은 계곡의 고독에서도, 높은 정상의 환희에서도, 하나님을 잃지 않으려고 붙들었던 내 삶이었다. 어제 잔잔히 오고가는 대화속에 ‘불’과 ‘베드로’가 깊게 다가왔다. 누가복음 12장 49절에 예수님이 “내가 불을 던지러 땅에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개역한글 누가복음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KJV Luke 12:49) I am come to send fire on the earth; and what will I, if it be already kindled?
(한문성경 누가복음 12:49) 我來要把火丟在地上.倘若已經起來、不也是我所願意的麼。
(교육성경 누가복음 12:49) 내가 불을 던지러 이 땅에 왔노니 이미 불이 붙었다면 내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
그 불은 열정과 심정과 간절함과 절절함과 훨훨 타오르는 절규와 같으리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김구 선생이 썼던 회고록과 연설문에 자주 등장하는 ‘독립을 향한 염원’도 불과 같았다. 첫째도 독립이요, 둘째도 독립이요, 셋째도 독립이라는 그 반복법은 교과서에 자주 인용되어 회자(膾炙)되는 문장이다. 일어나도 잠자도 바라는 그 열망(熱望) 그 간절함은 ‘불’(火)이 되어 자신을 타오르게 한다. 불이 없으면 사람은 식은 인생, 죽은 인생이 되고 만다. 예수님은 불타는 인생을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지면서 그것을 이루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그 심정을 다시 닮고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이 없으면, 자신을 새롭게 변화할 기회를 얻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 날마다 달력의 숫자는 커져가지만, 인생의 내면이 성장하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것은 달력과 전혀 상관없다. 불은 태양과 같아서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능력이 있다. 불은 태움이 있어서 인생을 새롭게 재창조하고, 비진리와 모순을 불태워버린다.
지난 2016년 그 추운 겨울에 촛불을 들고서 광화문에서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킨 것은 열정과 염원이 하나로 합쳐진 그 간절함이었다. 불의 마음은 정권까지 새롭게 바꾸는데 하물며 인생이랴. 항온동물인 사람도 37도의 그 뜨거운 혈액이 온도로서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온도(溫度)는 참으로 소중한 가치이다.
– 불도 가까이 해야 불의 효력이 발휘된다.
어제 내가 들었던 가장 충격적이고, 마음에 와 닿는 문장이다. 베드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 표현이 나왔다. 베드로는 뱃사람이다. 갈릴리 호수, 결혼하고서 처갓집에 얹혀 살았던 가장(家長)으로 밤새 그물질을 했으나 물고기를 잡지 못한 절박한 그 때 누군가 나타나 배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그가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의 고향은 베들레헴으로 예루살렘 근처이지만, 어린시절 헤롯왕의 유아 살해사건 때문에 부모님이 피신하면서 갈릴리 근처에 있는 나사렛에 정착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 예수님이 배를 빌려달라고 할 때 베드로는 마땅히 거절할 수 있었으나 배를 빌려주면서 인연을 맺고 그때부터 예수님을 인생의 멘토로 삼고 살게 된다. 바다의 전문가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고기잡는 법을 조언하면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하니, 베드로가 그 말씀에 의지해서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다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수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불덩이’, ‘말씀의 불덩이’이므로 예수님을 가깝게 한 베드로는 그 불덩이로 녹아져 새로운 사람으로 재창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불의 속성은 모든 물질을 녹여서 새롭게 재창조한다. 뱃사람은 철보다 더 딱딱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사람도 예수님을 가깝게 하다보니 점점점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이 되더니 나중엔 산헤드린 의원들을 상대로 하나님의 뜻을 강연하는 청문회 증인으로 참석하게 된다. 훗날 가이사 앞에서 최후의 재판을 받고 장열하게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청춘의 회한(悔恨)을 씻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 베드로의 열정도 결국 예수님의 불이 심정에 붙어서 그러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 습관이 달라진다는 것, 그것은 마음의 불이 뭔가 붙어야 움직이게 된다. 어제는 그 어떤 만남보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를 고등학교 2학년으로 되돌려 성경을 다시 묵상하고 배워가면서 나의 하나님을 재인식하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잃고 있었던 많은 의미와 가치들을 다시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다양한 취미활동을 한다. 한자해석의 취미가 있고, 드라마 시청후기 작성 취미가 있고, 성경 에세이 작성 취미도 있고, 달팽이 기르는 취미도 있다. 달팽이는 사연이 있다. 5달 전 즈음 상추쌈을 먹다가 달팽이를 발견했는데 살아보겠다고 기어다니는 그 생명력이 마음에 와 닿아서 먹던 상추를 달팽이에게 모두 주고서, 살아보라고 환경을 조성해줬는데 벌써 5개월째 그 달팽이가 살고 있다. 나는 매주 양상추와 배추를 슈퍼에서 사는데 모두 달팽이의 것이다. 까페에서 만남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글쎄 그 달팽이가 새끼 달팽이를 데리고 있었다. 아주 작은 달팽이가 고개를 내밀고 양상추 잎사귀 뒤에서 더듬이를 빼꼼히 내미는데, 처음엔 5개월동안 성장한 달팽이가 이분법(二分法)으로 나뉘었나? 달팽이가 아메바처럼 그렇게 나뉘나? 눈이 혼동(混同)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아닌 것 같고, 내린 결론은 며칠전 준 양상추속에 숨겨져 살고 있었던 작은 달팽이가 함께 발견된 것이다. 큰 달팽이와 작은 달팽이가 이제 함께 양상추 속에서 살고 있다.
생명력(生命力)은 움직임이다. 움직임은 공간의 이동이며, 삶의 변화이다. 움직이는 생명체가 있으니, 나는 매주 양상추와 배추를 꼭 사서 달팽이에게 선물한다. 하물며 하나님앞에 인생이랴. 변화되는 새로움으로 고정관념을 탈피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을 습득하고, 어둠에서 빛으로, 비진리에서 진리로, 인본에서 신본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비판에서 이해로, 정죄에서 관용으로, 허위에서 정직으로, 가짐에서 나눔으로, 다툼에서 화해로, 전쟁에서 평화로, 망각에서 인정으로, 범죄에서 참회로, 비리에서 양심으로, 단절에서 연결로, 배반에서 믿음으로, 나태에서 성실로, 거짓에서 진실로, 참소에서 증거로, 죽음에서 부활로, 좌절에서 희망으로, 잃음에서 찾음으로, 불평에서 감사로, 불신에서 신뢰로, 넘어짐에서 일어남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새롭게 변화한다면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을 위한 배추와 양상추를 주지 않으시랴!! 나의 달팽이들을 보면서 더욱 불의 열정을 깨닫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