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칼럼은 정명석 목사님의 설교원문에 근거합니다.
[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오늘의 주일 말씀은 ‘담대함과 자르기’이다. 인생은 만남과 결별의 적분이다. 만남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좋은 만남은 아름다운 결과를 낳고 나쁜 만남은 고통을 준다. 모두 만남의 결과물이다. 만남과 결별은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결코 버릴 수 없는 가치들이다. 만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결별도 아름다운 것이다. 악한 자들과 결별해야 새로운 삶을 만난다. 떠남도 도착도 모두 필요한 가치들이다. 출발은 곧 그 위치를 떠남이다. 출발이 아름답듯 떠남도 아름다운 것이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다. 오늘 주일 단상에서 설교자의 음성은 계시록에 나오는 표현처럼 우레와 같았고, 울림이 깊었다. 그 이유는 2가지다. 하나는 설교자의 음성 자체가 정말로 깊고 우렁처다. 여자 목회자님인데도 목소리가 깊다. 듣고 있으면 진실성이 깨달아진다. 담대함이라는 단어를 외칠 때는 ‘담대하게’ 외쳐야한다. 그것을 명확히 표현해내는 목회자님이다. 드라마를 볼 때도 배우가 배역을 제대로 소화할 때 감동이 몇배로 늘어나고 시청률이 급상승한다. 이미 종영한 아버지가 이상해 드라마와 황금빛 내인생의 경우에 특히 감동이 컸다. 시청률이 40%까지 올랐다는 것은 배우들의 열연이 안방의 시민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것이다. 그저 재미만 있어서는 안된다. 그처럼 오늘의 설교말씀도 설교자가 단어와 표현과 문장과 문맥을 어찌나 감동적으로 말씀을 전하던지, 아마도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말씀도 왕의 명령처럼 그렇게 깊고 컸을 것이다. 그 울림이 빛의 속도로 전달되면서 빅뱅의 역사가 펼쳐졌을 것이다. 그저 폭발하는 화산과 같지 않고, 목적을 향한 창조의 역사였음을 믿어본다. 그리하여 담대하라는 그 말씀에 나는 담대하기로 크게 마음 먹었다.
또 하나, 설교 말씀이 깊게 울리는 것은 스테레오 시스템이 있다. 그 전에는 마이크를 1개로 사용했는데 꼭 평면같았다. 이제는 단상 마이크를 사용하면서 교회에 전체적으로 울려퍼지는데 마치 영화관에 있는 듯 어찌나 감동적인지,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말씀은 프린트로 읽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맛이 완전히 다르다. 마치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서 노트북으로 보는 것은 그저 줄거리를 읽는 것과 같다. 대형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음성 시스템에 있다. 보는 맛과 듣는 맛이 입체적으로 절묘한 효과를 발휘하면 영화는 마음속에 울림을 준다. 오늘의 말씀은 그와 같았다. 담대하게 제스쳐를 펼치면서, 축도기도를 하는 모습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듯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일은 마치 거침없이 왕의 조서를 읽듯 우렁차고 확신있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 담대해야할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있었다. 오늘 주일 말씀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 확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로 인도한다. 실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베드로의 위대함을 인정하지만, 그들의 생존하던 당시에는 인류 역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당대에는 볼품없었으나 훗날 인류문명의 중심축이 되었다. 성경은 그러한 역사를 일컬어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당세에는 이름도 없이 보잘 것 없었으나 2천년 역사의 근본이 되었던 것이다. 로마는 사라졌으나 로마 교황청은 지금도 존재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결국 차지함의 주인공이 된다. 노아시대에 모든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을 멸망시키고, 이후 인류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시라이, 가아안 등에 편만히 흩어져 살았다. 그때 가나안에는 가나안이라는 함의 자식의 후손이 먼저 정착해 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아주 훗날 그곳에 이주해서 살았다. 늦게 시작한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에게 아브라함은 이주민이고, 이방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이 후대에 이뤄졌다. 그 때가 바로 여호수아 시대이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다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능력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셨으니, 그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결정하시면 정녕코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하지 않으시냐, 그것이 관건인 것이다.
여호수아서 1장의 핵심은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그 말씀을 준행할 것’이다. 날마다 말씀안에 거한다면 그것을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불가능도 가능케 하고, 사람으로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말씀과 멀어지면 하나님과도 멀어져서 점점점 어둠에 묻히고 만다. 마치 아브라함과 멀어진 롯이 점점점 소돔과 가까워지면서 결국 심판의 주관권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날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진정 함께 하신다.
두 번째 감동의 말씀은 가지치기이다. 기독교복음선교회 월명동 수련원에서 요즘 가지치기가 한창 진행중이다. 가지치기는 곧 머리손질이며, 삶속에서 모순과 불의와 불필요한 일을 자르는 것이다. 자르지 않으면 거기에 묶여서 시간이 낭비된다. 그 무엇을 하더라도 자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루의 시간에서도 어떤 곳에 묶이면 시간이 거기에 사용되면서 결국 다른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 과연 무엇을 할 것이냐, 과연 무엇이 중요한가, 그 우선순위를 항상 하나님의 관점에서 판단해야한다. 위치(位置)는 곧 삼위로부터 놓여짐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자, 아담이 대답하지 않으니, 그때 하나님이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어디에 있느냐, 그것이 위치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디에 있느냐가 인생의 운명을 결정한다. 하나님과 가까운 방향에 있으면 곧 생명권이고, 하나님과 점점점 멀어지면 사망권이다. 위치는 하나님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경제적 위치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명예가 그 사람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명예와 경제적 위치는 단지 이 세상에서 가치들이고 위치일 뿐이다. 결혼을 하면 그것을 통해 맺어지는 사회적 역할들이 있는 것처럼 이 땅을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관계들이다. 영원한 관계는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맺어지는 영혼의 삶들이다. 가지치기는 곧 하나님을 중심으로 남길 것을 남기고, 버릴 것을 버리는 것이다.
말씀을 들으면서 보다 명확해졌다. 나는 날마다 시간이 부족해서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특히 책을 쓰는 일이 그렇고, 글을 쓰는 일도 그러한데 과연 무엇이 중요한가, 깊게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10년의 시간동안 내가 써놓은 수많은 글들을 보면서 그것이 나의 자산이 되었다. 과거는 그저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흘러가서 만질 수 없지만, 그 시간동안 내가 해낸 수많은 글들이 다시 나의 존재를 각인시키면서 내가 앞으로 해야할 일들의 방향을 지목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옳은 삶, 그 길을 앞으로도 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자,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그는 본 그대로 올 것이다”라고 했다. 땅에서 행했던 그 예수님의 모습대로 그렇게 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바톤을 이어받아서 산헤드린 의원들과 정치권력을 상대로 목숨을 내걸고 진실한 종교운동을 펼쳐서 300년이 지난 시점에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았다. 그동안 했던 옳은 일들을 이어받아서 주를 향해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본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은 “내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즉 그 철학과 가치관을 닮아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담대함과 가지치기’이다. 오늘도 나는 나의 삶속에서 보다 담대하고, 보다 날카롭게 자를 것을 자르고 이을 것을 이으면서 멋지게 인생을 살아야겠다. 이 마음의 감동을 버스를 타고 가면서 기록으로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