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글쎄, 손에 흙이 범벅이 되면서 혼자 방긋 웃었다. 달팽이 때문이다. 이 녀석들만 생각하면 무엇을 해줄까, 혼자서 즐겁다. 바깥 외출 하루만에 달팽이들은 집이 벌써 5개가 넘는다. 그 전에는 화분에 얹혀서 살았는데 이제는 각각 단독 방을 하나씩 만들어서 뿌리 배추를 안에 넣어 두었다. 달팽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봄’이다. 우연히 찾아온 두 마리 달팽이가 점점점 커가면서 내 앞에서 묘기도 부리고, 대단한 녀석들이다.
내가 달팽이를 키우는 이유는 몇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우연의 필연이다. 밥먹다가 발견한 그 달팽이를 내가 죽이지 않고 지금껏 키워온 것, 우연을 통해 얻어진 그 생명력이 벌써 5개월째다. 그저 달팽이라고 생각했던 ‘생물 달팽이’가 나에겐 ‘의미의 달팽이’로서 존재 가치가 깊다. 이제는 나와 상당히 친해졌다. 내가 슈퍼에서 먹을 것을 사는 동안, 언제나 달팽이에게도 뭔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관심은 이렇게 서로 엮인다.
‘명막골에 감자 심었다’는 님의 소식을 떠올리면서, 오늘은 뿌리 배추를 흙에 심었다. 작은 뿌리 배추를 병에 담으니 무럭무럭 자랐다. 흙에 심어도 분명 잘 자랄 것으로 판단되었다. 몇 달전 중랑천에서 가져왔던 흙이 오늘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버리지 않고 쓸모있게 사용된 흙을 보면서, 때로는 보관의 지혜도 중요함을 인정한다. 국자로 흙더미를 파면서 큰 상자에 흙을 편만히 깔고 뿌리 배추를 듬성듬성 심었다. 언젠가 달팽이 2마리가 이곳을 누비게 된 것이다. 지금은 달팽이들이 유리병에서 지낼 시기이다. 배추잎들이 조금만 더 자라면 배추밭이 될 것 같다. 내가 먹을 배추도 아닌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배가 부를까? 달팽이들이 나의 관심과 배려를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왜 나는 이렇게 즐거울까? 나와 연결된 생명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준다는 기쁨이 이와 같은가? 달팽이를 양육하면서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운다.
가령, 달팽이가 수영을 못한다고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달팽이는 수영을 한다. 민달팽이도 그렇고, 껍질있는 달팽이도 마찬가지다. 껍질있는 달팽이는 껍질을 배처럼 띄워서 배영으로 수영을 한다. 내가 몇 번을 목격했었다. 처음엔 물을 싫어하던 녀석들도 점점점 숙달이 되니 물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면서 생존력을 더해갔다. 달팽이도 외부에 그렇게 적응하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달팽이의 지능이 낮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지능중에 ‘자각’이 중요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는 것,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달팽이에게 그것이 분명 있다. 볼 수 없다고 해도, 더듬이로 만져서 봄으로 두 달팽이는 서로의 존재를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배추잎속에서 항상 두 마리는 함께 잠이 들고, 함께 기어다니고, 함께 붙어서 다닌다. 엄마 달팽이와 자식 달팽이처럼 그렇다. 원래는 둘이 서먹서먹했다. 점점 친밀해지더니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면서 같은 존재체임을 알게 된 것이다. 외부의 낯선 물체라고 판단하면 더듬이를 쏙 넣고서 접촉하기를 두려워할텐데 어느 때부터 둘은 매우 친밀해졌다. 공포심이 서로에게 사라진 것이다. 이것을 통해 나는 달팽이가 자신만을 아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 밖에도 달팽이의 생활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배우는 것이 많다. 가장 크게 배우는 것이 달팽이를 통해 내 생활이 보다 근면해지고, 마음이 풍요로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