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고기중에 안심살이 맛있다. 안심은 보통 안심(安心)의 의미로 해석된다. 안심은 마음이 편안하고, 조용해진 상태이다. 편안할 안(安)은 여자가 왕관을 쓴 모습이며, 집안에 여자가 있다는 것은 집안살림을 도맡은 가정주부이고, 나아가 집안의 소유권이 여자에게 속했음을 말해준다. 모계사회(母系社會)의 흔적이다. 심(心)은 심장 2개를 상형문자로 그렸다. 점 2개는 동맥과 정맥이다.
돼지고기와 소고기에서 안심은 ‘安心’과 다르다. 안심은 순 우리말이다. 등심은 등쪽에 붙은 심줄이고, 목심은 목쪽에 붙은 심줄이고, 안심은 안쪽에 붙은 심줄이다. 안창살은 ‘안쪽 창’으로 신발의 밑창을 뜻한다. 안창살은 신발 바닥을 닮아있다. 심줄은 힘줄로 발음된다. 치마살은 허벅지 부분으로 ‘치마입는 부분’이다. 치마처럼 생겼다. 특히 이 부분은 채받이살이라고도 한다. 채찍을 맞는 부분으로 살덩이라서 덜 아픈 부분을 때리는 것이다.
한자에서 소와 돼지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소, 돼지, 개가 상당히 중요했다. 왜냐면 이들은 제사음식으로서, 신과 만날 수 있는 매개체이다. 창조(創造)에서 造에는 ‘소’(牛)가 들어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 집(家)에는 돼지가 있으며, 시간을 규율하는 동물의 띠에서 돼지띠가 마침표이다. 해(亥)가 돼지를 본뜬 글자이다. 돼지는 요즘도 돼지머리로 제사음식의 핵심이다. 돼지는 곧 사람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도록 중간의 교량역할을 했고,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동물들이 사람 자체로 대체된다. 구약은 동물을 제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면, 신약은 사람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스스로 정결한 마음을 담고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보다 종교의 차원이 높아진 셈이다.
개(犬)도 제물로 사용되었다. 초복, 중복, 말복은 옛날 동이족이 개를 제물로 사용해서 제사를 지냈던 흔적이다. 이때 개는 반드시 땅속 깊이 파묻었다. 엎드릴 복(伏)은 개가 사람에게 엎드린다는 의미지만, 실상 개를 제물로 잡아서 땅속에 파묻는 것을 뜻한다. 개의 입장에서는 거룩한 희생이고, 사람의 입장에서는 개를 대신해서 액땜을 하는 것이다. 그러할 연(然)에도 개(犬) 고기(月) 불 화(灬)가 들어있다. 개는 들에서 불로 구워서 먹었다는 의미인데, 잡아 먹는 개념이 아니다. 들에는 제단이 있었으니 당연히 들에서 개를 잡는 것이 마땅했다. 제사음식이 생활음식이 되면서 초복과 중복과 말복에 개를 잡아먹는 풍습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동이족이 한자를 만드는 중심부류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설득력(說得力)이 있다.
종교(宗敎)는 무엇인가? 종(宗)에 대한 가르침(敎)이다. 종(宗)은 示를 덮고 있는 뚜껑(宀)으로 제사상을 뜻한다. 제사상은 곧 사람과 신이 만나는 공간이며, 시간이다. 신(神)은 누구인가? 작게는 집주인과 같고, 크게는 대통령과 같고, 더 크게는 창조주에게 귀결된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민족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었지만, 파라오라는 왕의 신을 섬기면서 힘겹게 살아야 했다. 이집트 민족은 히브리 민족을 학대하면서 일한 만큼 댓가를 주지 않았다. 이유는 이방민족이라서 그렇다. 지금으로 말하면 외국인 노동자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어떤 신을 믿느냐로 그 대우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宗은 사람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상이고, 신의 입장에서는 ‘神’이다. 神은 일반적인 신(神)이며, 귀신(鬼神)은 귀가 있는 신, 혹은 보편적인 신을 의미한다. 귀(鬼)는 무녀(巫女)가 탈을 쓰고서 굿을 하는 모습을 본떴다. 가면극을 연상하면 鬼의 의미가 쉽게 이해된다. 厶는 무녀가 들고 있는 부채, 칼 등이다.
인간은 유한하다. 한계가 있다. 유치원도 한계가 있어서 계속 유치원에 다니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 초등학교에 들어가야한다. 또 나이가 들면 중학교로, 고등학교로, 대학교로, 사회로, 노년으로 그렇게 황혼을 맞이한다. 해가 뜨면 중천을 지나서 황혼의 노을에 물든다. 해가 지면 다음날 동쪽에서 떠오른다. 하루가 지나면 내일 사람도 다시 일어난다. 그런데, 평생의 인생이 지면 그 육신은 영원히 일어나지 못한다. 육신이 죽으면 일어나는 그 존재체가 영혼이다. 영혼이 과연 어디서 일어날지, 그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종교(宗敎)이다. 사람이 땅에 한번 태어나면 그 부모와 혈연의 가족을 바꿀 수가 없다. 법률로 양자를 삼는다고 해도 피로 맺은 관계는 변경될 수 없다. 그처럼 육신이 죽으면 그 영혼도 태어남을 당한다. 그 태어남이 보다 좋은 곳으로 가길 간절히 바람으로 종교를 찾는다.
알면, 보다 나은 것을 택해서 현실에서 혜택을 받고 살아가고, 알지 못하면 거기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방식이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틀렸다, 맞다,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인생은 선분에 속해서, 그 끝날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 마침표가 찍히면 문장이 끝나듯 인생도 그러하다. 편지에 쓸 말을 모두 쓰면 봉투속에 담아서 봉인하듯 인생의 삶도 그러하다. 빈부귀천(貧富貴賤)을 떠나서 모두에게 해당되는 엄격한 진리이다. 보험(保險)은 위험을 보호하기 위해서 미리 미리 돈을 저축해서 대비하는 것이다. 보험은 질병과 노년과 재앙을 대비한다. 반면, 질병의 종국에 해당되는 죽음에 대해 그 당사자를 보상하는 보험은 없다. 사망보험금은 유족이 가져가지, 사망자가 가져가지 못한다. 이것이 보험의 한계이다. 어떤 보험도 노년까지 혜택을 줄 뿐, 노년의 종국을 지나서 혜택을 주지 못한다. 보험의 한계는 살아있는 동안이며, 그 이후는 종교로 귀결된다. 종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아가고, 인류문명이 존재하는 동안에 반드시 알아야할 절대적 진리이며, 그것은 각자의 영혼을 구원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해결하고 현실에 보다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냐를 스스로 깨닫고 알게 하는 것이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알면 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