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십자가(十字架)는 사형수를 못에 박은 형틀이었다. 조선시대에도 곤장을 칠 때 죄인을 십자가 형틀에 묶어서 내리쳤다. 나무에 메달아서 사람을 죽이거나 효수(梟首)할 때도 십자가 형틀이 사용되었다. 사람을 묶고 팔을 벌리게 함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도구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십자가 형틀에서 새로운 부활의 문이 열렸으니, 씨(氏)의 상징성으로 시대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로서 십자가 사건이 발생했다.
역사(歷史)는 무엇인가? 벼 화(禾)가 2개 있으니, 논에서 자라는 벼들이다. 止는 벼가 자라고 있는 논이요, 厂은 벼가 모두 자란 상태다. 止禾厂은 벼의 성장을 나타낸다. 歷을 ‘지낼 역’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을 말한다. 歷은 시작과 끝의 모든 과정을 말한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하길,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시작하시고,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찍으신다. 역사(歷史)는 곧 처음과 나중까지 모든 기록을 말한다. 처음과 나중은 곧 기점이 있다. 보편적으로 역사는 문자가 등장하는 시대로부터 시작된다. “구석기~현대”까지 기록으로 보관된 모든 과정이 바로 역사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역사는 무엇인가? 사람이 논하는 역사는 문자탄생에서 현대사까지이며, 지금은 배제된다. 즉, 사람의 역사는 역사가가 위치하는 현실은 없다. 오직 과거이다. 반면, 하나님의 역사는 다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시작과 끝은 사람과 달라서 그렇다. 사람은 100년밖에 살지 못하므로, 역사가가 살고 있는 그 시점은 역사에 포함될 수가 없다. 이는 왕의 행적이 왕의 죽음 이후에 기록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역사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류의 역사는 우주창조에서 종교창조와 그 끝이다. 즉, 우주창조, 인류창조, 종교창조의 마지막이다. 지금은 21C이고, 우리가 쓰는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부터 시작된다. 역사는 곧 시간이므로, 예수님이 초림때 오신 그 기점이 매우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곧 기점이며, 예수님이 오기전에 2000년전 인물이 아브라함, 4000년전 인물이 아담이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지금은 2000년이다. 우주창조는 7일로 완성된다. 확대하면 7000년이다. 아담에서 예수님까지 4000년, 예수님에서 지금까지 2000년, 앞으로 1000년이 합해지면 총 7000년이다. 하나님의 종교역사는 곧 7000년이므로, 지금도 역사에 포함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4글자로 섭리 역사라고 하고, 2글자로 섭리라고 한다. 섭리(攝理)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의미한다.
반복의 차원성으로 역사는 동시성이다. 초등학교 6학년 학문을 배워서, 그 배운 것을 토대로 반복해서 차원을 높여 중학교 3년을 더 배우고, 고등학교때 차원을 높여 반복해 3년을 더 배우면, 총 12년으로 모든 교육과정이 끝나고 전공과목으로 열매가 열린다. 그곳이 바로 대학전공과목이다. 학문이 반복의 차원성으로 완성되듯, 종교역사도 구약과 신약과 성약으로 차원성을 높여 반복되었다. 신약때는 죽음의 형틀에서 10년의 십자가를 졌다면, 지금 시대는 왕권 독재제도가 무너진 민주주의 시대이며, 종교의 자유가 헌번에서 보장되는 국민주권의 시대이므로, 종교로 인한 죽음의 형틀은 사라졌으나, 구속의 십자가는 존재한다. 억울한 십자가, 심정의 십자가, 누명의 십자가, 마치 요셉이 ‘유부녀 겁탈 및 강간 미수범’으로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듯이 그러한 고통의 십자가가 존재한다.
오늘은 시대 십자가의 10년 기간을 기념하는 성찬식(聖餐式)을 가졌다. 거룩할 성(聖)은 곧 성부(聖父)와 성령(聖灵)과 성자(聖子)와 성경(聖經)에 사용되는 한자다. 聖은 귀(耳)와 입(口)과 곧음(壬)이 합쳐졌다. 거룩함은 귀와 입에 올바름을 갖는 것이다. 하늘의 음성을 듣고, 그 진리를 외치는데 바른 심령으로 임하는 것, 정보홍수시대에 쉽지 않은 일이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한국사회에서 특히 정의롭게 살아내는 것은 고단한 일이다. 귀와 입이 오직 하나님이 말씀으로 진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거룩함의 본질이다. 찬(餐)은 먹을 식(食)과 같지만, 食보다 餐이 더 고급스런 표현이다. 만찬(晩餐)에도 餐이 사용되었다. 성찬식(聖餐式)은 거룩한 식사로서, 성스런 삼위의 하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기념예식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함께 성찬식을 가지면서 “떡을 먹으라 이는 내 몸이니라, 포도주를 마시라 이는 내 피니라”라고 했듯이, 이 시대 성찬식은 떡과 약수(藥水)로서 하나님과 사랑의 언약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몸과 맘과 행실을 정결케 하는 예식이다.
“주님이 몸이 되길 원합니다”
“아멘”
“깨끗해지길 원합니다.”
“아멘”
성직자를 통해 주님께서 내게 부탁했다. 주님의 몸이 되길, 깨끗해지길 원하셨다. 나는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그 순간 내 몸속에 들어온 작은 성체(聖体)로서 떡과 약수가 망각했던 많은 사연들이 기억의 수면위로 떠올리게 했다. 주님의 몸이 되어 산다는 것,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또 어디에 있으랴!!!
올해 성찬식에도 나는 마음을 결단하면서 내 자신의 인본을 벗어내는 다짐을 하고, 지금을 살아간다. 살 주(住)는 사람 인(人)과 주인 주(主)의 합성이니,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살아있음’이 아니겠는가? 주가 내안에, 내가 주안에, 그렇게 살다가 주님이 거하시는 곳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인생으로서 가장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볼 줄 아는 눈이 뜨이게 하신 하나님께 다시 깊게 감사를 드리며 지금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