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 / 장창훈]=성직자는 성직자다. 결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성직자의 능력은 설교 단상과 기도할 때 불이 되어 나타난다. 말이 불(火)인 능력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단상은 용광로처럼 뜨겁다. 오늘의 말씀은 얼마나 뜨겁던지, 십자가의 슬픔과 아픔, 부활의 기쁨과 자유가 함께 섞여서 애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내가 내린 결론은 성직자의 진실함이다.
나는 숙연(肅然)해졌다. 그 무엇보다 연약한 몸에서 위대한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는 단상의 목회자를 통해, 하나님은 연약하든, 강하든, 지혜롭든, 높든 낮든 그 무엇이든 모든 것을 불문하고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새롭게 됨을, 예수님은 이방땅에서 핍박의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바꾸었고, 이 시대는 중국에서 시대 예루살렘인 한국으로 방향을 바꿔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도가 시작되었음을, 다시 진지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칠흙같은 암흑의 10년이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간접살해당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상징의 사건으로 그 어떤 부엉이같은 족속이 그렇게 했던가? 그 당시 언론이 살해범으로 지목한 자는 현재 감옥에 갇혔다. (예수님때도 정치의 큰 자인 세례요한과 종교의 큰 자인 예수님이 함께 죽음을 당했다.) 정치의 큰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종교의 큰 사람은 온 몸으로 고통을 참아내면서 시대 판결에 사랑을 내놓고 그렇게 10년을 견뎌낸 십자가(十字架)였다.
나는 진지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을 못박은 본디오 빌라도를 ‘뇌물을 좋아하는 자, 건설업에 종사한 정치인’이라고 하니, 참으로 역사는 닮았던가? 한국정치권을 뒤집어버린 ‘뇌물과 횡령 사건’은 왜 빌라도를 지목하는가? 예수님은 첫 번째 헤롯대왕때 태어나 죽임의 위험을 당했다가 헤롯왕의 세습체제속에서 그의 아들이 다스리던 시기에 십자가를 졌다. 독재정권이 몰랐했으나, 묘하게도 보수대표로 권력이 이어지던 시기에 십자가 사건이 시작되었다. 빌라도의 통치기간 10년, 대한민국의 통치기간 10년에 두 대통령은 현재 옥에 갇혔다. 역사는 인본의 권력에 눈먼 자들에겐 비극이요, 신본의 믿음으로 인내를 견디는 자들에겐 부활이다.
사도바울이 십자가의 도는 헬라인에게 무지한 것이요, 유대인에게 거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시대 십자가의 도는 세상인에게 어리석은 것이요, 기독교인에게 불편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겐 그 능력이 10년의 고통으로 위대하니, 위대한 사랑의 십자가로 부활한 것이다.
부활은 오직 사망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죽지 않고 부활할 수 없다. 예수님은 부활했지만, 겨우 40일 잠깐잠깐 나타나고 사라지셨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 때 3천명앞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했지만, 그 현장에 예수님은 나타나지 못했다. 성경은 분명 그것을 증언한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부활을 논리정연하게 주장했으나, 그 나타남은 다멕섹에서 환상으로 본 것이다. 보란 듯이 드러내놓고 출현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사정은 육체의 내어줌 때문이다. 왜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고 했겠는가? 내어준 육체를 다시 찾아서 못 이룬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십자가의 도(道)를 나는 믿는다. 결박과 구속이 자유를 준다는 그 진리를 나는 겸허히 수용한다. 또한 영광의 길과 고난의 길이 항상 나뉘어 있음을, 어떻게 하느냐로 영광과 고난이 달라짐을, 나는 믿는다. 어찌 살 것인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번뇌하는 설교시간이었다.
사도 바울은 서신에서 기록하길,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다스린다”고 말했다. 실제로 로마교활청이 중세사회를 다스린 때가 있었으나 서신의 비밀은 영적인 핵심이 육의 정치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죽고 로마병정에 이끌려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40년후 실제로 로마가 티토 장군을 앞세워 예루살렘을 군화발로 짓뭉개버렸다. 영적인 세계가 무너짐으로 육적인 세계가 무너진 것이다.
십자가의 도(道)로서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성도들이 그 행실과 증거의 능력과 부활의 역사로서 세상을 점점점 의롭게 변화시킴을 믿는다. 결국, 오늘 하루 내가 말씀을 얼마나 실천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느냐이다. 단상의 깊은 심정이 강물처럼 내게 밀려와 울려 퍼지니, 나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심정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 그 가치를 진정 깨닫는 귀한 설교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