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나는 배움과 실천에는 3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學覺行이다. 學과 覺은 子와 見의 차이가 있다. 깨달을 각(覺)은 배움이 자라서 ‘覺’에 이르는 것이다. 깨달음을 보통 ‘영감’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질은 ‘배움의 완성’이다. 배움이 단계적으로 성장하다가 어느 순간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그 열매가 바로 깨달음이다. 즉, 깨달음은 배움의 줄기와 가지끝에서 열리는 것이지, 그냥 명상하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불현 듯 영감이 스쳤다고 하자. 그 영감이 스치게 된 기본적인 지식과 배움이 그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영감이 온 것이다. 만약 기본적인 지식과 평소 관심이 없다면 영감이 오더라도 그것이 영감인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배움과 깨달음은 상호 연결되어 있다.
깨달음 이후에 행함이다. 행함은 실천력이며, 실제로 그것을 하는 것이다. 뉴튼이 말한 관성의 법칙은 습관의 법칙이다.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이고 싶어하고,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하고 싶은 법, 사람도 마찬가지다. 습관(習慣)은 마음속에 꿰어진 것이라서 고치는 것이 중력을 벗어나듯 힘들다. 습관은 형성하는 것도 힘들고, 변경하는 것도 힘들다. 중학교에서 전학가는 것처럼 힘들고, 회사를 이직하는 것처럼 힘들다. 그래서 습관은 ‘좋은 습관’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어떤 습관이라도 한번 갖게 되면 사람은 그것을 편안하게 느낀다. 편안하면 계속 머물고 싶어한다.
나의 아저씨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 박동훈 부장이 “나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 내가 지탱하고 있었던 모든 기둥들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내 삶을 고뇌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라고 믿었던 모든 것과 기둥들’이 바로 습관이며, 정체성이며, 인식관이다. 개인의 습관은 곧 사회의 관습과 같다. 개인에게 고향이 있듯 국가는 서울과 도시가 있고, 문화가 있다. 그런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물이 얼음으로 얼 듯이 고정된 것이며, 물을 그릇에 담듯 담는 것이다. 어떤 그릇에 담을 것이냐는 본인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스티븐 코비가 늘 말했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법칙’에서도 스스로 습관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먼저 배우고, 배움을 지속하면서 깨달음의 열매를 열고, 이후 지속적인 실천을 날마다 행하면 습관은 얼음이 얼 듯 자신을 고정시키고, 그것이 창세기에서 말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다.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날마다 자신을 반성하고, 생각하고, 인지하고, 말씀의 거울로 비쳐보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누구나 점점점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게 된다.
앵무새도 배워서 말한다. / 2018.4.15. 주일말씀 요약본
얼마나 완벽한 말씀인지, 앵무새도 배워서 언어를 하는데, 왜 사람이 못하는가? 앵무새가 뜻없이 말할지라도, 그 말함으로 이미 주인과 소통을 한다. 언어의 소통이 아니다. 앵무새는 이미 주인의 귀여움과 믿음을 얻게 되었으니, 말함의 효력이 발휘된 것이다. 그 무엇이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신뢰하고 소통하는 관계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노력해서 익혀야한다. 왜 앵무새인가? 사람의 말을 계속 발음하면서 해내니까 앵무새다. 사람이 그저 앵무새처럼 따라하기만 한다면 비판을 받겠으나, 새가 사람의 언어를 말하니 그것이 신기한 것이다. 돌도 그 무늬에 코끼리, 사자, 표범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 값이 금값이 된다. 하물며 사람이랴. 신의 형상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진다면 얼마나 비싸겠는가? 마음판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기는 방법이 바로 진리의 말씀으로 날마다 묵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