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정리하려면, 다음 3단계를 따르면 된다.
첫째, 꺼내기
둘째, 버리기
셋째, 넣기
심플하다. 그러나, 통증이 따른다. 꺼내기는 쉽다. 책꽂이의 모든 책들을 꺼내고, 옷들을 옷장에서 꺼내고, 서랍에서 물품을 꺼내고, 창고에서 물건들을 꺼내는 것은 쉽다. 약간의 육체 노동이 필요하다. 방에서 모든 물건을 밥상위에 올려놓으면 책꽂이는 빈 공간이 되고, 얼마나 아름다운 들판의 여유이던가? 우리가 언덕에 오르고 싶은 이유는 빈 공간 때문이다. 지평선은 공간의 여유다. 우주도 공간의 여유다. 모든 행성은 공간속에 떠다니는 고래와 같고, 물속도 공간이다. 지구도 공간이다. 여백의 미는 오랫동안 한국화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리지 않는 것이 그리는 것이다. 가득채움은 모든 것을 버리게 한다.
보라. 들판이 아름다운 이유는 여유 때문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는 공기가 있다. 공기(空氣)는 빌 공(空)과 기운 기(氣)이다. 비어있는 기운, 그것이 공기다. 분명 존재하는 실체로서 비움이다. 비어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도 ‘존재의 하나’로서 자리잡는다. 이것이 바로 여백의 미다. 그리지 않는 여백도 그림의 일부가 되어, 그려진 것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배경은 실체를 돋보이게 하는 ‘실체만큼 중요한 상대체’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꺼내보면 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채워졌던 것인지, 꺼내보면 안다. 내가 15년동안 지속적으로 글을 써왔다. 요즘 썼던 글들을 모두 꺼내어 확인해보니, 산더미다. 폴더 개수만 해도 수천개에 달하고, 1개 폴더에 적게는 10개, 많게는 100개씩 글들이 쌓여있다. 어떤 폴더에 어떤 글들이 들어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해왔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언론인으로서, 작가로서’ 잘했다는 평가표를 스스로 작성한다. 꺼내보니, 내가 다시 보였고, 살아왔던 모든 삶의 글을 다시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책꽂이 정리다. 내 방의 책꽂이는 가로로 눕혀져 있다. 본래 세로 책꽂인데, 사는 원룸의 천장이 낮다보니 눕혔다. 눕히니 위쪽에 물건을 올릴 수도 있고, 화분을 놓을 수도 있다. 이사한 첫날 책들을 무작정 넣고서, 벌써 2달이 지났다. 오늘, 비로소, 모든 책들을 꺼냈다. 꺼내니 비워진 칸이 7칸이나 된다. 모두 가득 담겨져 있었는데, 꺼내니 여유가 생기고, 책꽂이 한 곳에 내가 사랑하는 달팽이의 집을 마련해주고, 그 옆에는 비어있는 채로 남겨져 있다. 버릴 것을 버린다는 것,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답고, 생동감있고, 생명력있는지, 나는 오늘도 깨닫는다.
버리기가 어렵다. 버리는 것은 생각의 결단이 필요하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생각을 버리지 못해서이다. 모든 것은 생각에서 결정된다. 나는 가끔 내가 썼던 글들을 과감없이 버릴 때가 많다. 버릴 때는 간단하다. 가위로 자르듯, 그냥 쓱 버리면 된다. 버릴 때는 ‘쓰레기 봉투’를 사와야한다. 사온 다음, 그냥 담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버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쉬움과 미련함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그 물건이 과연 필요한가? 절실한가? 썼던 적이 있는가? 물어보면 간단하다.
있을 것과 없을 것을 구분하기, 쓸 것과 안 쓸 것을 구분하기,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기, 이것은 생각에서 결정하고, 기준은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나는 많은 책들을 버렸다. 그때마다 내게 남겨진 몇권의 책들이 있다. 바로 한문책들이다. 갈등이론 서적과 법률서적들이다. 화법과 국문법 서적들이다. 글쓰기 교재들이다. 이런 책들은 내가 지금 글을 쓰는데 영감을 주고, 방향을 알려주고, 글의 소재와 재료를 제공하고, 막막함에 도달했을 때 출구를 준다. 심심할 때 꺼내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게 해준다. 아까워서 버리지 못하는 책들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실용서적들이다. 그런 책들만 살아남았다. 버려진 책들은 기억에서도 지워지고, 아깝지도 않다. 버릴 때는 과감하게 버려야한다. 버리면, 비로소 공간에 여유가 생기고, 생각에 여유가 생긴다. 버리지 못하는 것은 생각의 가득참으로 ‘비만증’에 걸린 것과 같다. 달팽이가 아무리 힘이 강해도 자신이 짊어질 수 있는 무게의 집을 옮길 뿐이다. 달팽이가 어찌 사람의 집을 옮길 것이며, 돌맹이를 옮길 것인가? 달팽이는 달팽이의 집을 옮길 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한계이론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루 24시간, 잠자는 시간과 밥먹는 시간을 빼면 남는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 만약 시간을 여기저기 사용하면, 정작 써야할 매우 중요한 곳에 쓸 시간을 얻지 못하게 된다. 시간도 그러하고, 삶의 요소도 그러하다. 책꽂이도 마찬가지다. 많은 물건이 들어있으니 정작 중요한 것들이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있을 것과 없을 것을 구분하면 모든 것은 분명해진다. 남겨진 것을 다시 채우면 된다. 이것이 ‘넣기’ 과정이다.
생각이 복잡할 때는 나는 책상을 정리한다. 버릴 것을 버리기 위해 모든 것을 꺼내면, 머릿속이 모두 꺼내진 느낌을 갖게 되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내가 살아온 삶의 현실을 단면적으로 직시하며, 버릴 것을 버리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가 과연 어떠한 입장인지, 나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새로운 나로 태어난다.
시작은 사소했다. 내게 있는 두 책상, 우측 책상에 수북히 쌓여있는 책들, “빈 공터 만들기‘로 모든 것을 내렸다. 그리고 책상위를 A4의 빈종이처럼 만들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책상으로 만드니 생각부터 활력이 넘쳤다. 이렇게 좋은 것을, 왜 나는 그토록 책들을 쌓아놓고 살았던가? 왜 나는 책꽂이에 쓸모없는 책들을 넣어놓고 살았는가? 이것을 깨달으니, 내가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하는지, 내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과연 앞으로 어떠한 인생을 살아야할지, 깊게 자숙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쉽게 집안정리하는 법은 간단하다. 꺼내기, 버리기, 넣기의 과정이다. 이 단순한 방법을 실천해보면 의외로 얻는 것이 많다. 특히, 버릴 때 얼마나 큰 힘을 얻는지 새롭게 느낄 것이다. 버림은 그것으로 얻음이다. 버림과 얻음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버림을 통해서 남겨진 것들의 가치는 더욱 새로워진다. 버리지 못함으로 인한 묵직함으로 모든 것이 불편해질 수도 있음을…. 채움이 반드시 얻음은 아님을, 가지치기를 해야만 나무는 보다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음을, 버리지 못함은 조선시대 상투(常套)와 같음을…… 자르지 않는 머리로서 힘을 발휘했던 인물은 오직 장발장 삼손외에는 없었으니, 그 누가 이 시대 삼손처럼 장발로 다닐 것인가? 잘라야, 정리해야,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