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왜 글을 쓰는가?”라고 고종석 작가는 ‘조지 오웰’의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인용해서 말했다. 그 글이 공감된다. 짧은 단문의 의문문,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말하는가? 나는 왜 걷는가? 나는 왜 만드는가? 등등 짧은 의문문은 사람에게 본질로 향하도록 촉매제 역할을 한다. 마치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놓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니, 제자들이 서로 앞다퉈 이런말 저런말을 할 때, 예수님이 다시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사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듯, 그러한 질문은 절대적 명제와 같다. 과연, 나는 왜 글을 쓰는가?
“그냥?”
내가 아는 어떤 여학생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그 여학생을 생각하면서, “순수한 생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쓰라고 하니까 쓰는 것, 산이 있으니까 산을 오르는 것, 쓸 수 있으니까 쓰는 것, 등등 모든 것이 함축된 단어로서 ‘그냥’이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거나, 혹은 있지만 모두 말할 수 없는 뭉퉁거림의 ‘그냥’이다.
고종석 작가가 인용한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의 에세이집에는 ‘4가지 글쓰는 이유’가 거론된다. 그 중에서 ‘그냥’은 첫 번째 이유에 해당된다. 그냥 쓴다는 것은 자신을 나타내고 싶은 욕구의 표출이다. 일기를 쓰는 것과는 약간 다르다. 블로그를 하는 이유는 ‘그냥’에 해당된다. 자신을 나타내서 뭔가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것이다. 약간 정돈된 수식어로 표현하면 ‘순전한 이기심’이고, ‘자신을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순전한 이기심’을 목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옷입는 것’과 같다. 왜 우리가 옷을 입는가? 추워서? 아니다.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서다. 정치인들이 옷을 입는 목적은 ‘유권자의 표’를 의식해서 행동적 언어까지 감안할 것이다. 실제 페이스북 대표 저커버그는 미국 청문회에 등장하면서 정장 슈트를 입었다. 정보유출의 사과를 의미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입은 것이다. 이러한 옷차림은 ‘순전한 이기심’과 차별되지만, 평상시 옷입기는 순전한 이기심으로 자기표현의 욕구가 존재한다. 글쓰기가 그와 같다. 내 안에 있는 나를 드러냄으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의미를 나누고 싶어한다. 의사소통은 생각이 행동하는 것이다. 혼자서 명상하는 사람도 과거의 많은 생각들을 내면에서 정리하는 것이며, 그때 내면에 있는 생각들도 결국 외부에서 들어온 것들이다. 글쓰기는 곧 나를 나타내고, 그 나타냄을 상대가 알아주고, 알아줌을 통해서 그 누군가와 교감을 나누기 위함이다.
순전한 이기심으로 글을 쓰는 것은 가족 공동체와 교회 공동체에 활용하면 상당히 도움이 된다. 가족과 교회는 교감이 생명이다. 가족끼리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짧은 말속에 의미를 담아서 표현하는 것, 그것이 순전한 이기심을 바탕으로 하는 자기표현이며, 그러한 표현에 화답함으로 서로의 의미가 교감된다. 많은 말들이 중요하지 않다. 때론 종이 편지에 짧은 문구로 손글씨를 쓰는 것도 서로의 교감에 무척 도움이 된다. 물론 카톡을 활용하는 것,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사람과 사람이 눈을 마주보면서, 손글씨로 정성을 들이면서, 혀로 말을 내놓으면서 감정의 교류가 일어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킨 장면이 나온다. 떡을 떼서 제자들에게 나눠주고, 그 제자들은 다시 무리들에게 나눠줬다. 과연 그 떡이 ‘먹는 떡’이겠는가? 문학적 표현의 압축으로 먹는 떡과 말씀의 떡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오묘한 감동을 일으키는 기록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말씀의 떡을 서로 떼어 나누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말씀을 듣고 감동받은 것을 진심으로 짧게 표현하는 것, 세상적인 부서모임의 공지사항 전달로는 영혼의 숨결을 나눌 수가 없다. 예수님이 진리를 공지사항 전달하듯 하였던가?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전하면서 제자들의 반응을 들으면서 아픈 환자의 애로사항을 듣고 해결해주면서, 그렇게 흙먼지 마시면서 사람과 더불어 살았다. 자기표현으로 서로 공감하는 ‘공감 글쓰기’와 ‘공감 말하기’와 ‘공감 경청하기’가 사람의 관계속에 활발해진다면 좀더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