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만난 정명석 목사님
– 배구와 축구와 야구가 결합한 운동 멘토링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 / 장창훈]=어제, 월명동 건강한 약수를 마시면서, 운동을 통해 멘토링하시는 정명석 목사님을 뵀다. 30년 넘게 기독교복음선교회에 소속돼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변함없는 청년들을 향한 진솔한 삶의 모습, 진지한 인생교육을 보면서 ‘나의 30년’이 얼마나 귀중한 뿌리깊은 신앙의 삶이었는지 다시 깨달았다. 요즘 월명동 약수를 마시면서 치유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 나도 약수를 많이 마셨다.
“하나님을 마시렴”
– 나의 친구가 전해준 정명석 목사님의 멘토링
내 친구가 월명동에 있었다. 새벽일찍 도착한 월명동은 안개가 자욱했는데, 입구에 올라서자 모든 안개가 사라졌다. 구름 아래와 구름 위를 구분하듯 신기한 자연현상은 사람에게 설레임을 자극한다. 해외여행만 하더라도 가슴 벅찬데, 방문한 어제 여행은 위로 올라가는 ‘산속 건강여행’이었다. 운동장 한쪽에서 만난 내 친구는 내게 좌측, 우측 돌조경에 대해 핵심을 요약해 강하게 설명했다. 대학교때 만났던 그 친구와 인연이 또 만나니 이렇게 좋을수가….. 그 친구가 “약수를 마실 때 선생님은 하나님을 마신다고 믿으며 마신다고 하셨어!!”라고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가. ‘하나님을 마신다’라는 이 문장이 나를 약수로 이끌었다.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을 마신다’라는 그 문장이 나를 휘감았다. 벨트처럼, 혹은 옷처럼, 홋은 피부처럼, 혹은 머리카락처럼 나를 휘감았다. 걷잡을 수 없는 내면의 솟구침은 ‘나도 실천하리라, 행하리라’는 강한 집념으로 변화했고, 그 누구도 없는 약수터에서 귀한 조롱박으로 한번 한번 떠서 하나님께 간절히 바라는 몇가지를 기도하면서 약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마셨다.
‘약수는 하나님, 나는 하나님을 마신다’
그 사상은 하루종일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만물을 보아도, ‘만물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본다’라는 그 사상, ‘호떡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먹는다’는 그 사상,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현한다’는 그 사상, 그것은 청와대 대통령을 만나는 것만큼 귀중하고 가슴벅찬 설레임을 창조한다. 청와대 출입할 때는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고, 준비할 것이 많다. 준비사항 중 ‘진실함과 존귀함’은 무엇보다 첫째다. 국빈대접에는 ‘선물과 약속’이 동반된다.
많은 단체의 회장을 만났으나, 나는 정명석 목사님이 좋다. 어제는 운동을 통해 멘토링하시는 모습에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요즘은 소나무 전지(剪枝)를 통해서 청년들에게 삶의 지혜와 교훈을 직접 알려주시는데, 어제는 운동을 통해 삶의 교훈을 은은히 설명하시는 시간이었다. 나는 청중들이 길게 반원을 형성한 울타리 밖에 있었다. 울타리 안에는 30여명이 넘는 청년들이 축구와 배구의 자세로 있었다. 축구와 배구와 야구가 섞인 발배구를 하는 중이다. 축구와 배구와 야구의 핵심은 ‘공’이 아니다. ‘승리’도 아니다. 축구와 배구와 야구의 핵심은 ‘사람’이다. 정명석 목사님의 운동 모습을 보면 볼수록 사람의 인재를 알아보고,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부여하면서 서로가 어울어지고, 나아가 특기를 가진 자에겐 그 역량을 발휘하도록 전체 경기를 이끄시고, 항상 함께 참예함으로 모범을 보이신다. 이것이 어제 내가 봤던 운동 멘토링 깨달음이다.
왜 꼭 그물이 있어야하는가? 나는 그물없이도 청년들이 이렇게 재밌게 공을 만나고, 공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초긴장하고, 생명력있게 생동감있고, 간절함으로 몰입할 수 있는지, 어제 알았다. 그물없이 청년들이 배구자세로 흩어지고, 중심에 정명석 목사님이 계셨다. 좌측과 우측에는 공을 패스해서 올려주는 선수, 정명석 목사님 뒤편에도 공을 받는 사람이 포수처럼 있었다. 전체 형태는 야구인데, 야구 시스템으로 배구를 하고, 발도 사용할 수 있어서 축구도 허락된다. 규칙은 오직 1가지, ‘땅에 떨어뜨리지 않기’이다. 땅에 떨어진 볼은 죽은 볼이라서 다시 게임이 시작한다. 승부를 결정할 운명의 그물도 없고, 울타리도 없다. 나는 청중 울타리밖에 있었는데, 정명석 목사님이 발로 공을 “뻥”하고 길게 찼다. 그 공이 내가 있는 쪽으로 날아왔다. 울타리 밖에서 예측하지 못하게 날아온 그 공을 받아낸 사람이 있었다. 나도 그 공을 받아내는데 함께 동참했다. 살려내지는 못했으나 울타리 밖에도 경기에 포함됨을 알려주는 사건이다.
외국인도 함께 있었다. 그 외국인은 전봇대처럼 키가 컸는데 공이 갈 때마다 번번히 실수를 했다. 실수했던 그 외국인을 갑자기 중앙에 배치하게 하시더니, 헤딩으로 공을 그 외국인에게 주니, 그 외국인은 공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떻게 공이 오던지 공에 몸이 찰싹 붙어서 다시 공을 패스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공의 예술가였다. 공을 온 몸에 붙여서 혼자서 온갖 재능을 다 발휘하는 숨은 실력가였다. 이처럼 모든 사람의 재능을 인정하고 거기에 맞게 그 실력을 발휘하도록 운동시간에도 사람의 위치를 지정하고, 함께 호흡하면서,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스스로 깨닫도록 멘토링하는 그의 모습은 ‘설교’였고, ‘묵시’였고, ‘교훈’이었고, ‘삶의 길’이었다.
“출발!! 일터로!!”
어제 들었던 외침의 이 말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대학교때부터 여러번 나는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어제도 자원봉사로 참예했던 것인데, 내가 맡은 일은 전지(剪枝)한 소나무 가지들을 모아서 치우는 것이다. 설교말씀을 통해서 전지(剪枝) 이야기만 들었는데, 그저 미용실 헤어 디자이너처럼 소나무들이 이발한다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보통 이발을 하면 가위로 모든 머리를 한꺼번에 쓱쓱 잘라낸다. 염색할 때도 모든 머리를 염색약으로 발라서 말린다. 소나무 전지(剪枝)는 전체 머리를 가위질하듯 자르는 것이 아니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을 잡아서 가위질하는 것이다. 길게 뻗은 소나무 가지를 향해 장대처럼 긴 전지 가위를 올려서 하나씩 잘라냈다. 수백번, 수천번의 가위질을 해야만 소나무 가지치가가 완성되었다. 인생도 그렇게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살아가야함을 나는 인정하였다.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은 미용실 바닥에 수북히 쌓인 머리카락과 같았다. 그러나, 미용실은 그저 빗자루로 한번만 쓸면 끝나는데 소나무 가지들은 하나씩 끌어 모아서 정리해야했다. 작은 일이 아니었고, 진달래 나무위로 떨어진 소나무 가지들은 하나씩 발견해서 치워야 했다. 이렇게 세세하게 해야만 소나무들도 그 가지를 아름답게 뻗어서 자태를 뽐낸다. 나무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랴!!!
나는 하루에 책을 적게는 10권, 많게는 30권씩 출간한다. 노트북으로 책을 출간하는 일은 전지(剪枝)하듯 손작업이 많이 간다. 밤늦도록 일하다보니 나는 손가락에 쥐가 내릴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새벽 1시까지 책을 엮어서 출간한다. 손가락으로 타이핑하는 것이 무슨 힘이 들어갈까 싶지만, 계속 반복해서 그 일을 하게 되면 마비증상이 오게 된다. 전지(剪枝)는 팔을 길게 뻗어서 가위질을 해야하는 일이니, 책제작보다 수백배, 수천배 힘든 일임을 알 수 있었다. 반복된 일을 통해서 나무는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전지(剪枝)는 사소한 일이다. 가위질하는 그 사소한 일들이 모여서 소나무를 완전히 달라지게 만든다. 삶속에서 이러한 작은 일에 충성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그 어떤 나무도 스스로 이발할 수 있는 나무는 없다. 중도 제 머리는 못 깍는다는 말이 있는데, 소나무는 스스로 이발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누군가 가위질을 해야만 한다. 가위질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반복작업이 필요하다. 삶속에서도 매일 반복되는 일들의 중요성을 다시 깨달아 ‘자기라는 나무’를 가지치기하는데 정성을 다해야할 것이다.
나는 함께 자원봉사하는 팀들과 함께 끝까지 완결했다. 그래도 일은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해가 점점점 지므로, 해야할 분량의 일을 마무리짓고 내려오는 길, 자연성전(自然聖殿)이라고 적힌 간판석 우측의 작은 나무를 직접 전지하는 정명석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과감하게 자를 것을 자르는 행동력을 목격했다. 툭툭툭 가지가 잘려나가니 남겨진 가지들로 새로운 형상이 만들어졌다. 창세기 1장이었다. 구분과 지칭으로 빛과 어둠을 나누고, 물과 물을 나누고, 물과 땅을 나누면서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해야 형상과 모양이 각각 갖춰짐을 배우는 귀한 시간이었다. 니클라스 루만의 독일 철학자도 항상 ‘구분과 지칭’을 통한 시스템의 설정을 주장했다. 그러한 구분과 지칭은 삶속에서 ‘버림과 남김’으로 발생한다. 이후, 우연한 기회를 맞이해 하루동안 자원봉사를 기쁨으로 행한 것으로 사과즙과 오렌지를 직접 받는 시간도 있었다. 얼마나 기쁘던지, 하루의 수고가 보람찬 일과였음을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 모든 인생도 그렇게 살리라.
“하나님을 마신다”
이 문장처럼, 햇살로 하나님을 마시면서, 글로 하나님을 마시면서, 내 인생 신본주의로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출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