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드라마 칼럼]=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 부장이 아내와 대화를 거부하면서 겉돌기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는 그 자체가 지옥이다. 남편이 이미 외도사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은 사랑을 거부한 것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부부공동체를 유지한다는 것이 고역이다. 결별을 해야한다. 이혼을 해야하는데, 남편은 그 조차 말하지 않고 있다. 침묵보다 무서운 단절의 벽이 쳐져있다. 그런데 늘상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숨막히는 고통이 침입한다.
결국, 아내가 무릎을 꿇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고 짧지만, 깊은 뜻을 담아서 전달한다. 그 말에 박동훈 부장은 마음이 무너진다. 아내의 고백을 듣고 싶지 않았는데, 용서해달라는 그 참회마저 외면하려고 했는데, 박동훈 부장은 아내의 참회를 들어야 했다. 그 말에 자신은 견딜 수가 없다. 부실시공의 진단서와 같고, 노후도가 충족된 진단서와 같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바람핀 것은 내게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야!!! 내가 가치없는 존재라고, 쓰레기라고 사망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 없어!!!”
절규하면서 문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한다. 얼마나 침통한 표정인지, 딸기처럼 달콤할 줄 알았던 외도가 그렇게 무참하게 끝날줄이야, 더더욱 남편으로부터 사랑의 외면을 받는 아내의 비통함은 이제 중년의 권태를 향해 ‘사망선고’ 혹은 ‘재건축’을 요청한다. 부실하여도 그대로 살아가는 건물처럼 중년의 부부도 그런 경우가 많다. 뻔히 사랑이 식었는데,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데도 그냥 부부생활을 꾸려 나간다.
“사람이 사람에게 잘하는 것, 왜 그게 문제야!! 친절한 것은 당연한 것이야!!! 인간이 인간에게 친절한 것이 왜 문제야!!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아는 척 해야지, 껄끄럽고 불편해서 피하는 그런 관계는 되지 말아!! 그렇게 하자, 부탁이야, 네 할머니 장례식에 나는 갈거야. 그러니 내 어머니 장례식에도 와!! 그렇게 하자!!”
박동훈 부장이 이지안에게 한 말이다. 이지안이 선물해준 슬리퍼가 사라져서,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놨다. “다시 슬리퍼 사와!! 같은 걸로!!”
얼마나 합리적인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남의 눈치를 보면서 서로 모략하고, 서로 비난하면서 껌씹듯 험담하는 그런 비정상적인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동방예의지국의 자부심을 가져야할 우리들이 아니던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렇게 살아야한다. 이지안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준 박동훈 부장의 그 마음이 너무나 간절히 와 닿는다.
나의 아저씨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 다시 깊게 깨달았다. 인사(人事)는 사람이 사람에게 잘하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합당한 것이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있게 한 하나님께 잘하는 것, 그것이 최고의 인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