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역린(逆鱗)은 용의 거꾸로 난 비닐을 의미한다. 사람의 발바닥에 간지럼을 태우면 누구나 참을 수 없듯이, 사람에게는 ‘노여움’을 일으키는 발바닥이 존재한다. 각 사람마다 건드려서는 안되는 치명적 단점이 있는데, 그것을 말하게 되면 왕은 분노하기 마련이다. 왕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역린’이 있는데, 왕의 분노는 조직을 통한 행동력이 있어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린(逆鱗)은 왕의 분노를 상징하는데, 사실은 용의 거꾸로난 비닐을 말한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라고 대답할 수 있는 담대함이 있는가? 그것도 역린이라고 할 수도 있다. 100% 찬성은 언제나 만장일치로서 화목과 화합일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론 진실이 다수결이 아닐 때도 많다. 다수결로 진리와 진실이 결정된다면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어떤 불의도 존재하지 말아야하는데, 민주주의 제도에서 다수결은 불법과 불의도 용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미가 선지자의 경우에도 모든 계시자들이 yes라고 할 때, 미가 선지자만 no라고 했다. 지금 시대로 말하자면, 모든 정치인들이 전쟁찬성론을 펼쳤다면 미가 선지자만 전쟁불가를 외쳤다고 할 수 있다. (미가 선지자는 왕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길 원한다고 주장함.)
조선이라는 나라가 만약 ‘용’이라고 한다면, 정조는 거꾸로 난 비닐이었다. 역적(逆賊)의 아들이 곧 정조였다. 사도세자는 곧 역적이었고, 역적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신하들의 논리였다. 정조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고 선언했으니, 당시 지도층인 노론세력들은 벌벌 떨었을 것이다. 거꾸로난 그 비닐을 제거해야했으니, 사도세자를 죽였던 세력들이 사도세자의 아들까지 죽이기로 정도1년에 암살모의를 했으니, 그게 바로 역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다.
갑수, 을수, 살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린은 또 다르다. 갑수와 을수에게 역린은 곧 ‘양심’이다. 진실함은 곧 사람에게 역린같은 것이다. 사람은 정치제도에 속한 기계처럼 살아간다. 기계처럼 살지 않으면 그 조직에서 배제당하기때문이다. 옳은 소리를 하는 것보다 옳다고 되어있는 편에 속해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상황이 있다. 조선시대 18C는 노론이 집권층이었고, 노론에서 왕의 수족을 감시하기 위해서 ‘갑수, 을수’와 같은 간첩을 왕의 내시로 심어놨던 것이다. 갑수는 왕의 최측근 내시로서 활동했는데, 왕과 함께 살아가면서 왕의 진실함속에서 갑수는 기계에서 사람이 되어간다.
을수에게도 마찬가지로 완전한 살수(살인병기)로 살아가는데, 갑수라는 진실한 친구를 만날 때, 비로서 사람으로서 돌아가게 되는데, 진실한 자신의 아내를 만나서 사람으로서 마음이 동화되는데 결국 끝에 탈출하지 못하고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역린(逆鱗)도 비닐이다. 역린이 있으니까 용이다. 역린을 바로 잡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용의 모든 비닐이 질서정연하게 되어있으나, 역린은 거꾸로 되어 있어서 역린이고, 거꾸로 된 그 비닐(역린)을 바로잡아서는 안된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역린은 ‘친일파’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식민지 치하시절 일제의 장교로서 독립군을 학살하는 일본장교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치명적 과거였는데, 밑의 사람중에서 박 대통령에게 ‘친일’의 문제를 거론만 했다면 다음날 숙청당했다. 그처럼 역린은 결코 바로잡을 수 없다. 왜냐면, 바로잡으려고 그 역린을 건드리는 순간, 왕은 분노함으로서 역린을 건드린 사람을 죽여버리기때문이다. 정조에게 역린은 곧 사도세자였다. 자신의 아버지는 역적의 오명을 썼는데, 노론은 사도세자를 역적이라고 하고, 정조는 그런 역적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떳떳이 자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