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취약점(脆弱点)은 매우 약한 곳이다. 약할 취(脆)는 위험할 위(危)에 月이 붙은 것으로, 위험한 신체 부위다. 약(弱)은 약할 약(弱)으로 활(弓)이 풀린 모습이다. 夷는 활에 화살이 장착된 모습이며, 弟와 弔도 활에 화살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활은 활줄이 팽팽할 때 강하고, 평상시는 활줄을 풀어야한다. 弱은 활줄이 풀린 활이다.
약점의 보완(補完)은 경쟁사회에서 최고 목표다.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추구했던 ‘핵폭탄’처럼, 강한 무기로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 경쟁사회에서 보편적 프레임이다. 취약점(脆弱点)은 제거해야할 대상일까?
소셜 미디어를 보면, 나는 ‘나만 취약점이 많은 존재’로 느껴진다. 곳곳에 수십억을 돈을 번 사람들, 00평가대회 최우상 수상실적, 업계 1위, 세계 최초, 국내 1호, 패러다임의 변혁, 지성인의 최고 리더 등등 모든 강자는 소셜 미디어에 모여있다. 약한 자들은 왜 소셜 미디어에 등장하지 않을까? 그것은 약점이 가려져서다.
나도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준다. 치부(恥部)는 가린다. 가려야할 치부(恥部)와 아픈 과거는 그림자처럼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러한 아픔과 슬픔과 약점은 단지 치유해야할 상처인가? 아픔은 아픔으로 통한다는 사자성어 동병상련(同病相憐)은 공감(共感)을 이루는 필수 요소다. 아픔은 곧 상처요, 약점이다. 약한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약점이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수도 있다. 그것은 숨긴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심장은 강하지만, 약하다. 약해서 갈비뼈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만지면 쿵쾅쿵쾅 뛴다. 약한 심장을 강하게 할 수는 없다. 약함과 강함은 상대적 관점으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취약점의 연결은 신뢰의 시작이라는 조직이론이 있다. 약한 사람이 모여 촛불혁명을 이루듯, 약점은 약점으로 통한다. 우리는 늘 강점(强點)을 추구하면서, 상대에게 강점만 부각한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돌아서서 집에 홀로 남겨지면 누구나 광야를 걷는 야곱의 신세다. 약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사람은 바위가 아니다. 산도 아니다. 호랑이도 아니다. 개가 ‘으르렁’하면 겁부터 집어먹는 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약함을 서로 말하는 관계, 그게 친구(親舊)요, 소통(疏通)이다. 공감은 감정을 함께 어울리는 것이다. 약함이 약함으로 연결되어서 서로 위로를 받고, 치유받는 것이 취약점의 연결이다. 남편(男便)은 곧 편한 남자다. 편(便)은 변소(便所)에도 사용되는 단어로, 소변과 대변을 눕는 모습이다. 변(便)은 사람의 가장 취약한 배설물이다. 미스 코리아도 대변을 눈다. 냄새가 지독한 대변이 미스 코리아에게 날마다 있다. 그것은 없앨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누구나 약점이 있고, 그 약점을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남편(便) 여편(女便)이고, 친구(朋友)다.
사람은 마음의 존재다. 언어는 곧 마음의 연결이다. 그저 말로 떠드는 것은 언어가 아니다. 언어의 궁극적 목표는 마음의 연결이며, 소통은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서 같은 속성을 만나는 것이다. 약함은 숨기고 고칠 대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눔으로 연결하는 통로일 수도 있다. 약함의 신호로 다른 약함을 만나면, 그때 서로 신뢰가 쌓인다. 사람은 본래 약한 존재라서 그렇다. 그런데, 옷을 입듯 강한 척 나타날 뿐이다. 미디어 효과다.
나는 나의 약함에 대해, 연약함에 대해, 스스로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찾는다. 또 다른 방법으로 드라마를 시청한다. 드라마 속의 배우들은 그 역할에서 갈등과 문제에 봉착해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그들의 사연을 글로 기록하면서 나는 나의 약함을 인정하고 위로를 받는다.
중년의 나이에 나처럼 약한 마음의 친구를 얻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픈 일이요, 마음의 사람을 잃은 것이 슬픈 일이다. 어쩌랴!! 사람은 누구나 광야에 홀로 남겨진 야곱의 신세인 것을…. 하나님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인내의 존재인 것을…. 그리하여 나는 나의 약점을 인정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시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