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인류의 위대한 성현들은 예수님, 부처, 소크라테스, 공자로 꼽힌다. 이들은 모두 역경앞에서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위대한 영웅은 큰 환란앞에서 드러난다. 어려움은 누구나 직면한다. 마치 파도와 같다. 그 파도를 어떻게 이기느냐가 영웅인지, 아닌지 증명된다. 세상 사람들이 영웅이라고 추앙했던 항우는 향락의 파도에 무너졌고, 유방과 전쟁에 패하자 마음이 꺽였다. 반면, 유방은 항우와 전쟁에서 패하자 구걸하듯 목숨을 구해 재기(再起)를 노렸다. 영원한 승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와 불교는 내세를 이야기하고, 철학과 공자는 현실을 논한다. 기독교와 불교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나뉜다. 불교는 하나님의 존재를 명확히 말해주지 못한다. 기독교는 창조주를 알려준다. 기독교와 불교의 근본적 차이는 여기에 있다. 불교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신이 있는 현실을 부정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종교이다. 불교(佛敎)에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 새로운 자아에 이른다는 뜻이다. 기독교도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있다. 불교와는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는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관계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공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다룬다. 현실에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들이다. 기독교와 불교도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철학과 공자는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 공자는 인(仁)의 사상이다. 仁은 2사람의 관계를 의미한다. 친밀감이다. 서로 착하게 살아야 둘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나와 너의 관계가 좋아지면, 그렇게 세상은 더욱 친밀해져서 살기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론은 맞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仁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가족끼리도 서로 친해지는 것이 쉽지 않다.
소크라테스, 공자, 예수님은 모두 반대파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누명조차 ‘악법도 법이다’라고 인정하면서 망명의 길을 거부했다. 공자도 정적에 의해 정권에서 물러났지만, 여생을 지방대학 총장으로 보내면서 후세의 인재양성에 몰입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모함으로 십자가 사건을 당했으나, 그것을 구원의 기회로 삼고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었다. 이처럼 인생의 큰 스승은 인류가운데 큰 길을 제시한다.
내 인생의 스승이신 정명석 목사님은 10년의 십자가 고통에 갇혀 살면서, 인류가운데 “인생이 살아가야할 영원한 길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명길”임을 스스로 걸어감으로 제시했다. 환란과 향락과 태만과 교만과 부귀와 결핍의 모든 환경에서도 우리가 가야할 인생길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사람은 그 생명이 유한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영혼의 생명이 영원성을 갖게 된다.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 바로 사랑의 생명길이다. 정명석 목사님의 10년의 십자가는 사랑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류를 위해 십자가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심정으로 그 맥이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