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역사적으로 가장 대범한 사문서 위조사건은 진시황제의 유서 조작이다. 진시황제가 죽기전에 장남 부소에게 왕권을 넘기고, 군사는 몽염 장군에게 맡긴다고 유서를 작성했지만, 왕명출납을 맡은 비서실장 조고에 의해 유서가 조작됐다. 이로인해 진(秦)은 진시황제 사망후 2년만에 멸망했다.
만리장성(萬里長城) 때문이다. 몽염장군은 만리장성 건축 담당자였고, 장남 부소는 건축 감리로 근무했다. 정작 진시황제를 보필하는 측근은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였고, 막내아들 호해가 따랐다. 상황이 이랬으니, 진시황제는 평생을 바쳐 숙원사업을 이뤘으나 후임자 선정을 미리 준비하지 못해서 왕조의 멸망을 맞이한 것이다. 이로서 달성(達成)보다 수성(守城)이 어렵다는 것이 여기에서 나온다.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건축한 이유는 도참설(圖讖說) 때문이다.
“진 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은 호(胡)다”
진시황제는 胡를 흉노로 해석했다. 도참설은 ‘비유’로 적혀있다. 비유는 쌍방향 해석을 해야하는 것이다. 외부의 적이 있다면 내부의 적도 존재한다. 통일왕국의 최대 적은 ‘흉노족’이 맞다. 반면, 통일왕궁의 내부적은 ‘절대왕권을 대항하는 귀족’이다. 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공범이 되어서 유서를 위조해 황제로 세운 ‘호해’(胡亥)가 바로 ‘胡’였던 것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도참설이 도참설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만리장성은 진나라-조나라-연나라의 북방 국경선을 중간중간 보수공사를 통해서 하나로 연결한 건축공사였다. 산속에 건축공사를 진행해야했으므로 몽염장군의 건축작업은 ‘전쟁’보다 더 사망률이 높을 정도로 힘겨운 일이었다. 지금도 포크레인과 각종 장비가 투입되어서 성곽보수 공사는 어렵다. 기계없이 거의 맨몸으로 돌을 옮겨서 공사를 진행한 만리장성 공사는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진시황제는 통치 13년동안 5회 중국순회를 돌았다. 마지막 순례길을 가기전에, 몽염장군에게 중국내부 도로정비를 맡겼다. 산시성(陝西省)의 길을 뚫는 도로공사였다. 길이 완성되자, 진시황제는 내부순환도로를 활용해서 월남지역 회계산에 이르렀다. 회계산은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했던 곳이다. 이때 동승했던 인물이 환관 조고, 승상 이사였고, 26명의 왕자중에 막내아들 호해가 함께 했다.
회계산에서 바람을 쐬고 황해(중국동해)를 따라 위로 올라가는 중, 낭야산 근처에서 진시황제는 병환이 갑자기 깊어졌다. 몽염의 동생 몽의에게 몽염장군을 급하게 호출하고, 진시황제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환관(宦官) 조고(趙高)는 황제의 말을 전달하는 입(口)과 같았다.
대언자로서 조고는 황제의 유언장을 외부로 공개하지 않고, 승상 이사와 왕자 호해를 불러서 유언장 조작의 음모를 공모했다. 진시황제의 유언장이 그대로 공개되면, 호해는 국물도 없고, 승상 이사도 좌천되거나 유배를 당할 수밖에 없다.
진시황제는 유언장에서 부소에게 황제를 물려주고, 몽염장군이 황제장례위원장을 맡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조고는 ‘화씨지벽으로 만든 황제의 인감도장’을 가지고 있었으니, 유언장을 조작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하라는 조서를 각각 내렸더니, 부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몽염장군은 ‘유언장 공개’를 요구했다. 환관 조고는 몽염을 결국 살해했다.
진시황제가 중국통일을 꿈꾼 근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목적은 그 성취 이후에 결과로 드러나니,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 천하통일을 이루길 원했던 것 같다. 전쟁에 빠져 목숨을 잃는 백성들의 안타까운 고통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느꼈다면, 천하통일후 만리장성이나 아방궁을 건설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어떻게 하면 잘살게 할까? 맛있는 밥을 먹게할까? 그것에 집중했을 것이다. 오직 본인의 영달을 위해서 ‘황제’라는 칭호를 살아있는 동안에 부르게 하고, 영생불사 불노초를 구해오라고 국가예산을 낭비시키고, 바른 말을 하는 장남 부소를 멀리 유배보냈던 것같다.
모든 것을 얻었으나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한 가장 단명한 왕조의 첫 번째 황제로 살다 끝났다. 막내아들 호해(胡亥)는 2년만에 조고에게 암살당하고, 이후 영웅 항우에게 진(秦)은 넘어간다. 유언장 조작에 가담했던 환관 조고, 왕자 호해, 승상 이사는 모두 최후가 비참했다. 진시황제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그들을 노려봐서일까? 남을 억울하게 하면 결국 자기도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 같다.
‘남잡이가 자기잡이’란 격언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