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물었다.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그리고 다시 물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사도들에게 물었으니, ‘너희’는 실상 ‘너’를 의미한다. 각자에게 눈을 쳐다보면서 대답할 자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때 베드로가 말했다. (성경에는 베드로만 말했다고 기록되었다.)
개역한글 : 마태복음 16장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개역개정 : 마태복음 16장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耶穌說、你們說我是誰。西門彼得回答說、你是基督、是永生 神的兒子。耶穌對他說、西門巴約拿、你是有福的.因為這不是屬血肉的指示你的、乃是我在天上的父指示的。
이 질문이 자주 내게 주어진다. 예수님앞에서 그렇게 담대히 고백했던 베드로는 제사장의 계집종이 예수님을 아냐고 물으니, 지혜로운 처세술을 빙자하여 저주하며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 사건이 만약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삶속의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한데, 하나님은 CCTV처럼 인생을 감찰하시는 것 같다. 마태와 마가가 복음서에 ‘베드로 부인사건’을 기록한 것을 보면, 베드로가 스스로 회한에 사무치는 사건이었고, 자주 간증을 하면서 사람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위대함을 고백했음을 유추해본다.
그 비겁한 베드로를 왜 사람들은 높일까?
그 괴팍한 바울을 왜 사람들은 추앙할까?
많은 답이 있겠지만, 오직 하나 두 인물의 공통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겹쳐 보임이다. 예수님이 그들속에서 느껴지니,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이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예수님의 향기가 살결로 스민 것일까?
내게 누군가 “이름이 바뀌었다”고 자랑했다. 자랑할만하다. 또 누군가는 내게 “사인을 선물로 받았다”고 말했다. 자랑할만하다. 또 누군가는 내게 “사명을 받았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악수를 했다. 코치를 받았다. 면담을 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증표로서 “측근이었다”고 말했다. 역시 자랑할만하다.
내가 베드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예수님께 이름을 받은 부분 보다는 계집종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참회하면서, 세상을 향해 바위처럼 살아낸 것이다. 내가 바울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진정 깨닫고 돌이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사명에 순복하며 살아낸 것이다. 행위로서 말씀을 이룬 깊은 신앙의 사람들이 내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많아졌으면 참으로 좋겠다.
이름을 받았으면, 그 이름을 부르는 자앞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것이요, 사명을 받았으면 사명을 주신 분께 진실한 소명으로 임할 것이요, 코치를 받았으면 그것을 실행하는데 전념을 다할 것이요, 측근이었다면 마땅히 민폐를 끼친 것이 없었는지 스스로 삼갈 것이요, 면담을 했다면 진정 스스로 달라졌는지 돌아볼 일이다. 베드로가 디베랴 호수에서 진정 참회했으니 ‘하나님과 연결된 새로운 베드로’가 되었고, 바울이 다멕섹에서 진정 돌이킴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새로운 바울’로 태어난 것이다. 그 외에 무엇이 중요하랴!!!
그래서 나는 오늘도 냉장고를 열고서 ‘그가 내게 준 오렌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였다. “오렌지처럼 멋지게 살자”라고. 그 외에 무엇이 중요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