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있는 질서문화 / 성숙한 질서문화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성직자는 성직자다. 영적 성직자는 뭔가 특별하다. 그 말을 들어보면, 사용하는 단어의 깊이가 남다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니는 교회가 참 좋다. 근본은 기독교복음선교회, 다음은 내가 다니는 지금의 교회다. 오늘 예배 후, 질서의 근본에 대한 말씀이 있었다. 듣고서 깨달음이 컸다.
오늘 교육의 근본 핵심은 하나님의 영적 질서였다. 영적 질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질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마치 예수님 앞에 미리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처럼, 높은 곳은 낮게, 낮은 곳은 높게 만들어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주의 길’이다. 주가 원하는 일, 주가 가고자하는 방향, 주가 보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질서’인 것이다.
새벽 3시에 택시를 탄 적 있다. 택시 운전사에게 물었다. “왜 신호등이 계속 파란불이죠?” 그 운전사가 “구간별로 신호등이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함께 파란불, 함께 빨간불이죠,”라고 알려줬다.
정체구간은 정체구간대로, 체증이 없는 구간은 없는 구간대로 각각 다르게 교통 신호등이 바뀐다. 대통령이 만약 국빈을 모시러 나갈 경우, 모든 교통신호등은 교통순경의 통제하에 놓이고, 그때 구간별 교통신호등 체계로 관리한다. 이것이 곧 질서다. 대통령이 하고싶은 일을 하도록 그 순간에 신호등까지 협조한다. 질서는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장유유서’(長幼有序)다. 나이순이라서 그렇다. 12띠가 그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했다. 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곧 나이를 묻는 것과 같다. 나이에 따라 화법까지 달라진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존칭화법을 쓰는 것이 한국문화다. 질서는 곧 ‘나이’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신앙세계는 질서가 무엇인가?
오늘 교육에 따르면, 영적 질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질서이다. 앞서 말했던 대통령의 차량이 길을 갈 때 교통신호등이 일괄 통제되듯, 신앙의 질서는 하나님의 일이 되게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와있듯이, 세례요한의 역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나의 길’을 예비하는 자는 곧 ‘육적 사람’이고,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는 ‘영적 사람’이다. 그렇다면, 주의 길은 무엇인가? 그건, 묻지 않아도 마음으로 깨닫는 그것이다. 주가 원하는 일, 주가 바라는 방향, 주의 마음, 주의 의향, 주의 희망, 주의 소원 등등이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했었다. 그때 베드로가 막았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이 잔이 나를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했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이가 여기에 있다. 때론, 현실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베드로처럼. 베드로가 방해꾼이 되려고 예수님을 막아선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보호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 영적인 눈을 떠야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셨다. 이것이 곧 영적인 감각이며, 영적인 질서인 것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 ‘순리’가 있다. 순리(順理)는 곧 순서(順序)로 다스리는 것이다. 순서가 곧 질서다. 둘은 근본적으로 같다. 순서(順序)는 물이 흐르듯 차례를 지키는 것이다. 물은 곧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상징하는 표현인데, 근본은 ‘질서’다.
하나님의 근본세계는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아니고, 영적 질서의 세계이다. 즉, 하나님을 보다 근본적으로 중심하는 자가 ‘장자’이다. 영적 장자권은 하나님을 더 중심하는 자를 의미한다. 여기서 ‘더’는 자신의 삶속에서 육적 생활보다 영적 신앙을 더 중심하는 것을 뜻한다. A와 B를 비교해서 A가 B보다 더 신앙적이다는 개념이 아니다. A는 A로서, B는 B로서 자신의 삶을 놓고 각자 저울에 달리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을 놓고 보면, 차자였던 아벨이 영적 장자권을 가졌다. 야곱과 에서를 놓고 보면, 차자였던 야곱이 영적 장자권을 가졌다. 반면, 노아때는 셈과 함을 놓고 볼 때 장자였던 셈이 영적 장자권을 가졌다. 나이의 많고 적음, 가족에서 서열이 신령한 세계의 질서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 얼마나 진실하게 말씀을 순복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달라지는 것이다.
젊은 날, 형의 축복권을 뺏었다고 생각한 야곱이 21년 동안 삼촌 라반의 집에서 엄청난 고생을 하고, 노년에 사랑하는 요셉까지 죽은 것으로 소식을 들었던 그 야곱이 요셉의 생존을 알고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이집트로 이주하고, 17년을 더 살았다. 말년에 축복기도를 하려고 요셉의 두 아들을 불렀다. 그때 요셉은 장자로 므낫세를, 차자로 에브라임을 세웠는데, 야곱이 손을 엇갈리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의 순서로 야곱이 엇갈린 것이다. 오랜 세월, 야곱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처럼, 순서는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결국 질서는 ‘하라는 것 하는 것, 하지 말라는 것 안하는 것’이고, 주가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길을 마련하는 것이며, 최소한 주의 길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오늘 나는 내가 다니는 교회가 지역사회에 있음을 진정 감사하였고, 더불어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의 작은 의자가 있음을 진정 감사하였다. 의자가 있다는 것은 내가 앉을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나의 위치가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처럼 나의 마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좌석이 되길 기도하였고, 질서의 근본에 대한 교육을 들은 후에는 하나님의 일이 되어지도록 길이 되고 협력할 뿐만 아니라, 최소한 주의 길을 방해하지 않도록 유념하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