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그 어느날, 나의 심경이 처참했을 때, 그날도 나는 취재현장에 있었다. 누군가를 만났는데, 내게 내 심경을 알고서 마음을 위로하면서 답을 말해줬다. 가슴이 쿵당쿵당, ‘누구지?’라는 물음표가 들 정도로 나를 아는 누군가 앞에 있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상대의 말속에서 내가 느낀 감동이다. 그때 문자가 왔다. 나중에 확인하니, 사연편지였다.
처음엔, “사연편지가 도적같이 와서 내가 못 맞았네, 아!! 그 인터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하니, 인터뷰를 하면서 느꼈던 감동과 그 사람의 말들이 물결처럼 생각났다. 예사로 듣기엔 나를 너무 잘 아는 사연들이었다. 사연편지처럼 신령한 역사가 일어났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사연편지가 오듯 사람을 통해 오시는 주님을 맞았다”라고 나는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리고, 인터뷰했던 그 사람의 말을 내 가슴속에 깊게 새겼다.
이러한 경우가 현실에서 자주 발생한다. 하나님께 사과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실제로는 사과즙이 나타나거나, 혹은 포도가 오는 경우가 있다. 포도가 오니, 그것을 배척한다. 삶속 무지속의 상극세계다. 느고를 배척하는 요시야처럼 그런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간혹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통해서, 내 주변 사람을 통해서, 후배를 통해서 ‘충고’로 올 때가 있다. 쓴 약을 먹듯 그것을 먹으면 병이 고쳐지지만, 뱉으면 병이 고쳐지지 않는다.
올해 첫 월명동에 방문했을 때,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나는 양복을 따로 준비했다. 수요예배가 있으니까, 작업복에서 양복을 갈아입고 서울에 올라와서 예배에 참여할 목적이었다. 옆에 앉은 형이 내게 양복이 뭐냐고 물어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 형이 내게 “그를 본 것이 예배다”라고 했다. 나는 “맞아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라고 말했다.
그날 아침말씀중에 “예배를 드리러 서울에 가야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일찍 작업을 마쳐야한다. 앞으로 수요일은 자원봉사 작업은 없도록 해야한다”라고 나왔다. 버스에서 나눈 대화의 답이 그대로 나왔다. 나는 속으로 “우와 서울 가서 예배를 드리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월명동 돌조경에서 예배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자원봉사를 하고 있던 나는 멀리서 봄으로 예배에 참여했고, 그날 작업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오렌지를 선물로 받았다. 생활예배를 드린 것이다.
‘사과 대신 오는 사과즙’은 한번 건너서 오는 경우를 의미한다. 대신자를 통해서 할 때가 있다. 상황과 여건이 그러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다.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인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가져올 때가 있었다. 내가 그것을 거절하면 그것으로 끝나거나, 아주 긴 시간을 돌아서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A를 기다릴 때 A가 주어지면 좋지만, A1 A2 A3 혹은 B가 올 수도 있다. 그 상황과 여건으로 주어져서 그렇다.
인생이 살면서 가장 행복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이다. 설령, 내가 원하는 방법과 방향으로 기도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과 대신 주어지는 사과즙의 방향이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함께 관여하고, 개입하고, 역사한다는 그 믿음에 따라 오늘도 매순간 나를 찾아오는 주님을 잘 맞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