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2달 동안 ‘전도와 집필’로 정작 중요한 말씀상고에 게을렀다. 오늘은 늘 해왔던 말씀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앞으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예배 때 들었던 감동을 적은 말씀, 더불어 말씀원본을 다시 묵상하는 시간이 내게는 참으로 귀중한 시간들이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글을 썼고, 잠시 눈을 붙였다가 2달만에 다시 말씀을 붙들었다. 이렇게 10년을 살아간다면, 아!!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이상세계 동물 조각’과 관련된 사연은 다시 읽어도 뭉클하다. 또한 섬뜻하다. 이탈리아 최고급 대리석, 핑크빛이 도는 흰 대리석이 부처상이 될 뻔 했는데, 하나님께서 여건과 상황을 틀어서 아름다운 조각상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보좌 옆에 놓였다고 하니, 감동적인 사연이다.
“인생의 조각가는 하나님이 보내신 주입니다.”
<네가 만든 조각상>도 ‘하나님의 성전’에 왔으니, 이제는 <너>도 와라.
– 2018. 6. 10. 주일말씀 중에서
조각은 그 형상이 중요하다. 어떻게 깍고 다듬느냐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로서 구상의 설계도를 언급하셨다. 인간창조 설계도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어떠한가? 경제가 최우선의 가치인 ‘자본주의 사상’에 따라, 금권(金權)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조각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은 권력(勸力)에 의해, 각종 취미와 오락과 땅에 속한 것들에 의해 인(印)을 맞는 경우가 많다.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어찌 받을 수 있으랴.
정명석 목사님은 나에게, 우리에게 크게 2가지의 형상과 모양을 조각하셨다. ‘짝의 개념’을 새롭게 하신 것이다. 짝은 곧 ‘우상(偶像)’인데, 우상은 잘못된 짝을 의미한다. 바람피는 것으로 이해하면 쉽게 이해된다. 배우자가 있는데, 다른 사랑의 짝을 가졌다면, 사랑의 우상이 생긴 것이다. 근본의 짝은 누구인가?
수평의 관계로 논한다면, 남자와 여자가 사랑의 짝이다. 요즘은 ‘간통죄’도 사라져서, 부부의 사랑도 정조 개념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자는 서로에게 사랑의 짝이다. 수직관계로 논한다면, 짝이 달라진다. 이는 남편으로서 남자의 짝이 부인이지만, 아버지로서 남자의 짝은 자식인 것과 같다. 수직관계에서 인생의 짝은 전혀 달라진다.
인생의 근본적 짝, 수직관계로서 영적인 짝은 바로 하나님이다. 영적인 근본의 짝, 수직관계로서 짝이 뒤바뀐 사람이 너무 많다. 나도 그 짝이 뒤바뀔 뻔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남편”이라고 고백했듯이, 하나님은 사람과 사랑의 짝이요, 남편이다. 정명석 목사님을 통해, 내 인생이 가장 크게 조각받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또 하나는 내 인생의 개인적 짝으로 영혼의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이다. ‘수평의 짝’에 대해서만 세상은 논하지만, 결국 인생은 홀로 남겨진다. 홀로 남겨진 인생에게 육신의 짝이 영혼이라는 것, 영혼이 너무 너무 너무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것, 영혼은 곧 육체앞에 작은 하나님과 같고, ‘짝’이다.
국제평화축구대회가 열리는 동안, 피카소 돌이 있는 ‘하나님의 의자’를 중심으로 경호원을 배치해서 사람들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의자’ 주변을 보호하신 그 철학을 하나님이 보시고, 어찌 하셨을까? 물컹물컹 푹신푹신하게 느껴지는 피카소 돌의 형상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처럼 심쿵했다. 하나님을 사랑의 근본자로 삼고 사시는 정명석 목사님의 사상이 깊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오늘 말씀을 상고하면서, 피카소 돌(하나님의 의자)을 마주보면서 본부석에 앉아계셨던 그 장면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