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의 맞이활동과 성도의 이름 암기
– 주차안내도 주차목회에 해당된다
나는 목회를 해본 적은 없다. 단지, 월명동 그 사람, 정명석 목사님의 삶을 통해 목회의 본질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본다. “복음은 곧 복음의 운영이다”라는 말씀에 따라, 목회는 성도들에게 신앙을 불어넣는 것인데, 어떻게 해야 효율적이고, 기술적일까, 그것을 생각해 본다.
이제 100일 정도가 지났다. 그가 부활하신 지, 그 정도 지났다. 베드로에게 두 천사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본 그대로 오리라”고 예언했는데, ‘본 그대로’는 베드로가 ‘본 그대로’로서 살아왔던 삶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약속이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대로 따라서 살아감으로 그 당세에는 그대로 이뤄졌다. 또한 신약의 큰 예언은 ‘본 그대로’의 약속을 따라 사람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행하심이 나타남으로 성취되었다.
내가 본 목회자로서 정명석 목사님은 ‘나의 시각’에 따른 것이지만, 1999년 이전과 지금은 많이 변화된 것 같다. 그때는 이곳저곳 정말로 부지런히 움직이시면서, 월명동과 서울과 전국을 순회하시면서 엄청난 열정을 쏟으셨다. 지금은 운동장을 돌면서 세계순회를 하셨다. 완벽한 변화다. 지난 5월 ‘탁구 운동과 우천 골프’때에도 열정을 불태우면서 모인 청중과 화동했고, 국제평화축구대회에서도 청중과 선수들속에 들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이셨다. 그리고, 언제나 화룡점정처럼 사연편지로 오지 못한 성도들까지 챙기시는 모습, 그것이 ‘내가 본 목회의 모습’이다.
얼마전 ‘월명동 홍보의 방향’에 대해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 주장의 근본은 ‘방문객을 활용한 홍보 시스템’이다. ‘할 때 하라’는 잠언과 맥락이 이어진다. 월명동을 방문한 그 때 모든 것을 하는 것, 정명석 목사님은 청중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다. 마치 예수님이 들판에 모인 청중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듯이, 하늘의 감동과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
교회 목회도 이와 같다. 10명, 20명, 50명, 100명 규모라면 목회자가 집까지 찾아가서 가정심방도 할 수 있다. 그러나, 300명, 500명, 700명, 1천명이 넘어서면 목회자가 가정심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때는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 방법을 활용해야한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은 제자들을 활용한 그룹 멘토링이다. 5천명에게 말씀이 모두 전해지는 방법은 그룹별로 팀모임을 하는 것이다. 10명씩 나누면, 500개 큰 팀이 만들어진다. 10명씩 1팀을 구성하면, 10팀씩 큰 단위로 묶어서, 각 대표들에게 제자들을 파견해서 말씀을 전하면, ‘말 전달하기’처럼 전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마이크로 전하면 모두 들을 수 있지만, 그때는 그렇게 했다.
목회는 설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목회는 부서 시스템이 아니다. 목회는 곧 목회의 운영이며, 교회행정도 포함된다. 목회는 학교로 생각하면 좋다. 교사들이 학생들의 교육을 실시하면서, 가장 크게 중심을 두는 것은 바로 수업이다. ‘수업’은 학생이 교실에 있는 그 시간이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교회에 오는 그 시간이 목회자가 최선을 다해야하는 시간이다. 성도들이 월명동을 방문한 그 순간, 정명석 목사님은 가까이할 수 있는 모든 열정으로 행하셨다. 그처럼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교회에 오는 2번의 기회를 반드시 붙들어야한다. 성도가 300명이라면, 어떻게 하면 그 300명에게 말씀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수시로 연구하면서, 만남을 가져야한다.
목회의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를 방문하는 성도들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만남에는 항상 ‘안내위원’이 존재한다. 안내위원은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주차위원, 둘째 맞이위원, 셋째 안내위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내위원은 좌석안내를 맡은 본당인데, 실제로 성도들이 교회에 올 때 맨 먼저 접하는 것은 주차위원이다. 주차위원은 차를 주차하는 것만이 아니다. 목회자의 발과 같은 위치로서, 주차위원의 무뚝뚝함은 곧 성도들에게 교회의 무뚝뚝함으로 비쳐질 수 밖에 없다. 목회자가 아무리 감동적인 설교를 한다고 하여도, 주차위원이 성도들에게 불편함을 준다면, 성도는 교회에 불편함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누적되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지 못한다.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목회자는 잘 알지 못한다.
목회자는 ‘대외집행부’로서 주차위원을 배정할 때도, 그들도 주차목회를 한다는 것을 인식시켜야한다. 목회(牧會)는 ‘양을 친다’는 개념이다. 즉, 성도들과 접하는 모든 활동이 목회인 것이다. 교회 행정이 진행될 때 모든 사역자가 바로 목회를 하는 것이다. ‘복음은 곧 복음의 운영이다’는 말씀과 맥락이 같다. 주차안내를 하는 사역자는 전봇대처럼 서있으면 절대로 안된다.
둘째로 맞이안내다. 맞이안내는 사람의 얼굴과 같다.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위치다. 목회자가 목회의 눈을 뜨면, 맞이안내에 제일 집중하게 된다. 요즘 초등학교는 교장과 교감이 7시에 출근해서, 학생들을 맞이한다. 교문에 나가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인사를 한다. 교장은 정문에서, 교감은 후문에서 맞이활동을 한다. 등굣길이 모든 수업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교회 출입구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해야하는데, 마치 철조망을 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면, 성도들은 점점점 불편하게 된다.
맞이활동은 교회 출입구를 의미한다. 성도가 문을 들어서는 그 순간, 불편함이 없도록 목회자는 사역자를 잘 배치해야한다. 성가대의 찬양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성도들의 마음을 감흥시켜서 서로 연결되게 함으로 설교를 준비한다면, 맞이활동을 하는 그 사역자의 표정과 인사로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감흥시킨다. 이 부분의 눈을 반드시 떠야한다. 식당만 가더라도 손님 맞이를 어떻게 하는가? 백화점만 하더라도 출입구의 맞이활동과 각 매장의 맞이활동을 어떻게 하는가?
셋째로, 좌석 배치다. 나는 좌석배치에 대해 ‘자연스러운 순리의 방법’을 주장하는데, 그렇게 진행되는 곳은 월명동 외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월명동에 가면, 자신이 앉고 싶은 모든 것에 자연스럽게 앉는다. 만약, 월명동에 가서 각 사람이 앉을 좌석을 강제로 지정해주면 엄청난 불편함이 초래될 것이 분명하다. 각 교회는 장의자의 특성을 잘 파악해서 성도들이 오는 시간대에 따라 물이 흐르듯 순리적으로 앉도록 연구해야한다. 각 안내위원이 1명씩 앞좌석부터 배치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안쪽부터 앞쪽부터 앉기’를 캠페인으로 교육해서 모든 성도들이 문화적으로 인식하면, 안내위원은 방향만 알려줘도 앉을 곳을 찾아서 앉을 수 있다. 교통법에 빨간불은 멈추고, 파란불은 건넌다는 것은 문화적 인식이고, 약속이다. 그처럼, 모든 성도들이 ‘안쪽부터 앉기’를 질서의식으로 인지한다면 좌석배치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좌석배치가 곧 목회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목회자가 정말로 신경쓸 부분이 좌석안내일 것이다.
300명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면, 성도들의 모든 이름을 목회자단에서 밤낮으로 암기하고, 주일예배때 설교를 하지 않은 목회자단에서 맞이활동을 해보는 것은 어떠할까? 교회에 성도들이 올 때, 어떻게 하면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만날까, 그것을 고민한다면, 최고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만나서 어떤 깊은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김미숙 집사님, 어서 오세요. 장창훈 집사님 반갑습니다. 홍미란 권사님 안녕하세요. 박찬희 장로님 안녕하세요”라고 하면, 교회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름 불러주는 것이 곧 성도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름암기도 목회활동에 포함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