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시대가 변했다. 주입식(注入式)은 주사기(注射器)처럼 강제적으로 밀어넣는 방식이다. 군대에서 주입식 교육을 자주 사용한다. 한꺼번에 빠르게 업무를 추진할 때는 최고로 좋다. 식민지와 6.25 전쟁을 겪은 우리나라가 국난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주입식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아브라함때와 이삭때와 야곱때와 요셉때는 하나님의 역사방법이 각각 다르듯, 시대에 따라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고기잡는 법이 다르듯 그러하다.
요즘 학교는 토론교실과 하부르타 토론방식이 유행이다. 하부르타 토론방식의 반대는 ‘밥상머리 교육’이다. 한국의 밥상머리 교육은 앉혀놓고, 위에서 아래로 계속 말하면서 세뇌하는 방식이다. 아랫 사람은 무조건 윗 사람의 훈계를 받아야하고, 변명은 할 수가 없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농경사회는 아버지의 권위가 가장 중요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질서가 잡혀야했고, 학교에서는 교사를 중심으로 질서를 잡아야 했다. 요즘은 완전히 다르다.
학교의 중심은 학생이다. 교육 3주체를 말할 때는 반드시, 학생+교사+학부모이다. 시대가 달라진 것이다. 요즘 학교는 축제도 학생들이 의논해서 연예인을 섭외하고, 학생들의 사회를 보고, 학생들의 축제예산을 의논해서 집행한다. 옛날식 학교행정으로 생각하면 오산(誤算)이다. 이런 방식은 상대적 대화방식이며, 친구끼리 대화를 나누면서 작은 일도 결정하는 방식이다. 말씀을 강의할 때도 이런 방식을 적용하면 좋다.
대화식 강의를 하기에 앞서, ‘언어의 속성’을 먼저 인지해야한다.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어를 모두 사용하지만, ‘언어’는 상징성이 있어서 서로 다른 의미로 인식된다. 가령, ‘어머니’라는 말을 모두 사용하지만, 그 의미는 모두 다르다. 나는 나의 어머니를, 독자는 독자의 어머니를 각각 생각한다. ‘어머니’라는 의미가 주는 속느낌은 모두 다른 것이다. 사물명사는 그 의미의 차이가 보다 덜하다. 초콜릿이나 커피나 소나무 등에 대한 이미지와 속느낌은 거의 대부분 비슷하다. 비슷하다고 해도 똑같지는 않다. ‘소나무’에 대해 각자가 생각하는 소나무의 느낌을 갖고 있다. 언어는 그 자체가 상징성을 갖고 있어서 그렇다. 언어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인간은 두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지구 세계에서, 다른 하나는 의미 세계이다”라고 말한다.
추상명사의 경우, 완전히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진리, 자유, 정의, 평화, 사랑, 희망, 성공, 믿음, 역사…. 이런 추상명사는 각자가 전혀 다른 의미로 생각한다. 그것을 먼저 인정해야한다. 가령,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열렸을 때, 양측은 모두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 모두 정의라고 믿고서 그렇게 목숨을 내걸고 싸운다. 판사들도 ‘정의로운 판결’이라고 판단하고 판결했다. 판결문은 하나인데, 그것에 대해 느끼는 의미는 모두 다르다. ‘정의’는 단어는 하나인데,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각자 모두 다른 것이다. 추상명사에서 이런 현상이 극단적으로 발생한다. 강사가 아무리 ‘정의’라고 말해도, 그 ‘정의’를 듣는 교육생은 교육생의 입장에서 ‘정의’로 느낀다.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대화식 강의가 중요한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듣고 이해하면서 교감하고 공감하기 위해서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은 2가지가 있다. 첫째, 상대의 말을 자신의 입장에서 듣는 것, 둘째, 상대의 말을 상대의 입장에서 듣는 것이다. 2번째 단계로 듣는 것이 바로 경청(傾聽)이다. 경청화법은 상대의 말을 듣고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상대가 어떤 말을 하면, 상대의 입장에서 그 말뜻을 이해하려고 깊게 생각하는 것, 그것이 경청이다. 말이 들리면, 사람의 뇌는 즉시 작동하므로, 자신의 의미로서 상대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다. 그 첫 번째 단계를 넘어서서 상대의 입장에서 그 말을 이해하려고 하면, 경청단계로 들어선다. 대화식 강의를 할 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경청하기 화법을 배우려면, 자신의 언어습관을 자신이 관찰해보면 된다. 친구와 대화를 할 때, 내가 하고싶은 말만 하는지, 혹은 상대의 말을 들을 때 내 입장에서 상대의 말을 듣는지, 혹은 입을 다물고 친구들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누가 말을 제일 길게 하고, 누가 짧게 대화를 하면서 상대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지, (맞장구 쳐주는 친구는 경청화법을 하는 사람이다.) 유심히 관찰해보면, 경청의 언어습관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그만큼 귀한 습관인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