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요즘, 교회에서 루만의 소통이론이 자주 활용된다. 루만은 사회학자로서 유럽에서 상당히 저명한 인물이다. 유럽 사회체계 학문의 중심에 ‘니클라스 루만’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슨스 사회학자의 이론은 실패했으나, 파슨스의 사회모델이 실패한 원인을 분석해서, 니클라스 루만은 전혀 새로운 사회구조로서 ‘소통의 체계이론’을 연구했고, 유럽은 루만의 사회주의 이론을 정설로 받아드린다. 그 루만에 따르면, 사회는 사람의 구성이 아니고, 오직 소통으로 구성된다.
루만 이론의 핵심이다. 사회는 소통의 구성이다. 사회는 사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얼핏 보기엔, 말장난이거나 상호모순의 딜레마처럼 보이지만, 루만이 정의한 사회의 정의가 바로 ‘소통’이다. 여기서 소통은 ‘연결’을 의미한다. 루만은 ‘선분’을 소통으로 정의했고, 그러한 선분들이 곧 사회의 구성요소라고 생각했다. 단지, 선분을 구성하는데 사용되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배제된다.
A와 B와 C가 있다고 하자. 기존 사회모델은 A와 B와 C가 매우 중요했다. 루만이론에서는 ABC는 사회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지, A와 B의 관계, A와 C의 관계가 사회에 포함된다. A와 B가 만약 상호작용을 엄청나게 많이 하면서 특별한 관계로 깊어진다면, 선분의 숫자가 많아질 것이고, 선분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 관계는 특별한 관계로 분화한다. 새로운 작은 사회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루만이론의 핵심이다.
루만은 사회를 소통체계로 규정하고, 소통의 자기생산을 구조나 행위에 앞서는 사회의 작동과정으로 보면서 이 난제를 해결한다. (중략) 소통은 인간이나 의식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소통 자신이 하는 것, 즉 소통의 자기생산이라는 통찰이다.
– 니클라스 루만으로의 초대 P8 발췌
이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중요한 소통의 본질이다. 우리는 소통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소통을 사람과 사람의 의사전달로 알고 있지만, 소통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소통의 본질은 자주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그 횟수가 많아질수록 소통의 깊이가 깊어지고,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A와 B가 한번 만나고, 또 만나고, 자주 만나다가 서로 결혼에 이르게 되면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를 구성하는 것과 같다.
반면, A와 B가 부부인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점점점 멀어져서 대화를 하지 못하다가, A는 집안살림과 육아에 빠지고, B는 직장과 다른 여자에 빠져살다가 결국 권태에 이르러서 이혼의 파탄을 맞이할 수도 있다. 소통의 횟수가 줄어들면서 서로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이다. 상당히 간단한 이론이며, 정곡을 찌른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가 줄어들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기도의 대화가 줄어들면, 점점점 빙하기에 이르게 된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기전에 자주 대화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모든 것이 간단해졌다. 이상세계가 이뤄지려면, 결국 소통으로 가능한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소통이 진리를 통해서 자주 일어나야하고, 사람과 사람의 소통도 진리를 통해서 자주 일어나야한다. 사람들은 항상 ‘서로 맞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그 말이 맞다. 서로 맞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맞지 않으니까, 서로 말도 하고, 불편한 것을 견디면서 다시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상대의 의견을 들으면서 서로 맞춰가면서 소통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친(親)은 친하다는 것인데, 볼 견(見)이 들어있다. 자주 보면 친해지는 것이다. 친구(親舊)는 오랫동안 보면서 지낸 사이다.
월명동 그 사람, 정명석 목사님이 부활의 역사를 시작한지 100일이 훌쩍 넘었다. 그 동안에 엄청난 만남의 소통과정이 있었다. 물론, 그 전에도 말씀을 통해서 주일말씀, 수요말씀, 잠언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소통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서, 낯설지가 않았다. 더불어 월명동에서 활동하시는 모습을 봄으로 소통관계가 되어서 또한 행복하다. 갑작스런 돌발상황으로 영상에 나타나실 때도 있고, 사연편지로 소식을 전해주시는 것, 거기에 댓글 반응을 허락하시는 것, 모두 소통관계로서 루만의 체계이론에 해당된다. 소통은 서로 어떤 모습으로든 자주 만나는 것이다.
얼마 전, 내가 썼던 ‘목회를 한다는 것’ 칼럼에서 못 쓴 이야기가 이것이다. 목회자는 교인들이 교회에 올 때, 또한 집에서 활동할 때, 그 무슨 방법을 활용해서라도 자주 만나야한다. 특히, 성도의 이름을 암기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한다. 그것은 1:1 소통관계여서 그렇다. 교인 숫자가 불어나려면, 전 교인이 전도를 해야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교인들과 목회자가 진리안에서 소통의 확산이 일어나야한다. 주일설교와 수요설교도 매우 중요하지만, 어떻게 하면 목회자가 교인들과 자주 소통을 일으킬지, 그것을 반드시 연구해야한다. 소통은 그 ‘횟수와 깊이’에 비례한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소통’이 핵심이며,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그 관계는 긴밀해지고, 끈끈해진다는 것, 그것을 기억하면 된다. 이런 측면에서, 정명석 목사님의 사연편지와 댓글 반응, 잠언 멘토링, 월명동에서 자유로운 만남, 돌조경 사연을 통한 멘토링, 주일말씀과 수요말씀 등은 ‘소통의 랜선’처럼 상호 연결된다고 할 것이다.
** 루만의 소통이론에서 ‘소통’은 통지와 반응으로 이뤄진다. A가 B에게 말을 하면, 그 말에 반응하는 것, 즉 통지와 반응이 곧 ‘소통’이다. 반응이 없는 통지는 소통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반응은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