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목회를 하거나, 사람과 친밀감이 필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의사소통’과 ‘화법이론’을 알아야한다. “말은 모두 같은 말이다”라고 생각하면 오산(誤算)이다. 말은 매우 민감하고, 잘못 다루면 폭탄이 되고, 잘 다루면 축복이다. “말은 복과 화가 들어오는 문이다”는 명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럼, 무조건 좋게 말하면 되는 것인가?
먼저, “말은 복잡한 존재물이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가령,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매우 매우 매우 매우 복잡한 단어를 꺼낸 것이다. A가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대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물었다면, 그것은 답이 없다. A가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면, 그것을 맞출 사람은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내가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정의는 무엇일까요?”라고 독자들에게 묻는다면, 그것을 맞출 독자는 아무도 없다. 추상명사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간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단어 하나가 이렇게 복잡한데, 수많은 단어들로 건축된 문장과 문맥과 내용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발표를 하거나, 토론을 할 때 언어의 속성을 아는 사람은 발표내용보다는 발표시간과 행동언어와 청중의 태도를 주목시키면서, 핵심을 전달한다.
어제, 북한 인공기와 미국 성조기가 각각 6개씩 12개가 꼽혀 있었다. 혹자는 6.12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든, 그 위치에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나란히 섰다. 거기서 서로 악수하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해야할 포즈와 인사는 그것 외에 없다. 언어는 이처럼 상황의존성을 갖는다. 또는,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단독정상회담을 마치고, 확대정상회담까지 마치고, 마지막 사인을 하기위해 테이블에 각각 앉았다. 거기서 과연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무엇이겠는가? 140분동안 토론했던 모든 내용들에 대해서 말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기자들이 앞에 있고, 전세계가 주목하는 그 순간에, 해야할 표현은 정해져 있다. 이것이 언어의 상황의존성이다. 결혼식에는 양복을 입어야하고, 신랑은 신랑답게, 신부는 신부답게 갖춰야한다. 장례식장에서는 슬픔의 마음과 짙은 옷을 입어야한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려면 최소한 운동복과 축구화를 갖춰야하고, 청중이 보는 곳에서 탁구를 하려면 대표급 실력을 갖춰야한다. 그처럼, 언어는 그 상황에 맞게 해야한다.
오늘, 유권자로서 선거투표를 하고왔다. 나는 어떤 행사를 가든, 출입구에 서있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그 행사장에 초면이고, 상대는 그 행사장의 얼굴이다. 행사에 책임을 갖고 교육을 받은 전문가는 3~5m 정도에 손님이 나타나면, 인사를 하면서 맞이한다. 반면, 들러리로 서있는 사람은 손님이 오면 먼 산을 보듯 못 본 척한다. 오늘 내가 갔던 곳에서 맞이를 해야할 그 사람이 나를 본척 만척, 전봇대처럼 서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주민들을 그렇게 맞이하더라도 그날 잠시 자원봉사하는 사람으로서 무슨 불이익이 있을까싶지만, 특별한 모임이나 행사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언어의 상황의존성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행사장의 초입에 서있는 사람은 반드시 손님을 맞이하는 언어로서 깍듯이 맞이하는 행동까지 해야한다. 하지 않을 것이면 그곳에 있으면 안된다.
내가 오래전 다녔던 어떤 교회에서 ‘예배시간 지키기 캠페인’을 한다면서, 늦게 오는 성도를 문앞에 세워놓고 5분동안 기다리게 했던 적이 있다. 상당히 불편했다. 성도들은 불만을 토로했는데, 교회는 그 정책을 고수했다. 예배시간에 늦는 습관은 고쳐지지 않으면서, 성도들은 문앞에 기다리면서, 그 지킴이는 살벌하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성도들의 소통이 점점점 나빠졌다. 언어의 상황의존성을 알았다면, 교회 담임 목사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 몰라서 그렇게 한 것이다. 1층까지 내려가서 멀리서 오는 성도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맞이해도 부족한데, 오는 성도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았으니, 사람의 심리를 너무 몰라서 빚어진 촌극이다. 문은 맞는 곳이니, 막으면 안된다. 언어의 상황의존성을 인지하면, 문앞에서 환영의 맞이활동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김정은 위원장이나 트럼프 대통령도 서로 만난 자리에서는 누가 먼저일 것도 없이 환하게 인사하고 맞이활동을 했다. 교회도 그래야한다.
가령, 나는 자식을 키워본 경험은 없지만, 화법이론에 따라 가족소통을 이야기한다면, 가족끼리 대화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있다고 하자. 가족의 친목도모를 위해서 가족여행을 해야한다거나, 가족회의를 특별히 만들어서 서로 대화하는 시간을 늘려야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부모가 의식적으로 자녀와 대화시간을 만들려고 자녀방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묻고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만약, 이러한 가족이 있다면, 좋은 방법이 있다. 언어는 그릇의 속성이 있다. 언어의 그릇에는 진정성을 담을 수 있다. 학교에 가는 딸이나 아들에게 진정한 마음을 담아서 “그래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하렴”이라고 말하면서 어깨를 툭툭 두둘겨준다면 자녀는 금새 “우리 부모님은 정감이 넘쳐”라고 느낄 수 있다. 날마다 사소하게 자녀를 인정하는 대화습관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참조 소통의 횟수 관련 칼럼)
http://www.ebsnews.co.kr/?p=14270
어떤 행사장에 가면, 그때의 어법은 명함과 정중함이다. 명함이 없으면, 양복을 입지 않고 결혼식장에 간 것과 같고, 양복을 입고 운동하겠다는 것과 같다. 물없이 수영할 수 없듯, 명함없이 행사장에 가는 것은 사람을 사귈 수 없다. 낯선 사람과 인사를 하는 화법은 간단하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명함을 건네면 된다. 그러면 상대방도 명함을 주는 것이 예법이다. 이것이 언어의 상황의존성이다. 그 상황에서는 그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은 안하지만, 내가 봉헌위원을 할 때가 있었다. 봉헌위원을 할 때는 최대한의 격식을 갖춰서 해야한다. 헌금을 하는 사람이나 하지 않는 사람이나 깍듯이 예우하면서 헌금함을 보석함을 받들 듯이 모시면서 다녀야한다. 그것이 예법이다.
구호(口號)는 사람들이 상당히 잘못 알고 있다. 호(號)는 호랑이 호(虎)가 들어있다. 호(號)는 호랑이의 울부짖음이다. 호랑이는 산이 울릴정도로 표효한다. “어흥”이라고 하면 산이 쩌렁쩌렁한다. 마치 사람이 정상에 올라서 “야호”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 구호는 짧아야한다. 구호는 청중을 하나로 뭉치는 것을 목적으로 결단의 약속을 하는 것인데, 긴 문장을 나열하면서 구호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구호는 짧게 하는 것이다. 이것도 언어의 상황의존성이다.
예배를 드릴 때, 사회자(司會者)가 있다. 사회자(司會者)는 회의를 맡은 자(者)의 개념인데, 예배에서 사회자는 그 역할이 다르다. 결혼식에서 사회자와 예배의 사회자는 그 역할이 비슷하다. 결혼식 사회자는 주목받아서는 안된다. 주목받을 사람은 신랑과 신부이고, 주례이다. 사회자는 신랑과 신부를 소개하고, 주례자가 드러나도록 소개하는 역할이다. 예배의 사회자도 그 역할이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관계사명에서 세례요한의 역할이 곧 사회자이다.
사회자가 예배를 시작할 때, 첫 시작기도를 한다. 이때 정말로 길게 기도하는 사회자가 많다. 언어의 상황의존성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대표기도가 있고, 사회자의 시작기도는 시작에 맞게 예배의 문을 여는 것으로 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나오기 직전, 사회자가 설교를 하듯이 청중에게 말씀을 전하는 경우가 있다. 사회자 역할을 몰라서 그렇다. 예배의 핵심은 설교다. 설교자가 나오기 직전이면, 그때는 설교자에게 성도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먼저는 설교자의 존함을 불러야한다. 짧지만, 명확한 수식어로 설교자를 소개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설교자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설교자를 모시면 된다. 사회자에서 설교자로 성도의 시선이 옮기는 이 순간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도 언어의 상황의존성이다. 알면, 사회자가 행할 것이고, 모르면 못한다.
부서 모임을 하는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1분 스피치를 하는 것이다. 이때 아이스크림 마이크(휴대용 소형 마이크)를 이용하면 좋다. 10명이면, 10분동안 설교를 들은 감동을 모두 공유할 수 있다. 이때는 규칙이 있다. 지도자가 맨 먼저 말하는 것인데, 이때 본인부터 1분동안 말해야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기자교육을 많이 하는데, 학생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30명의 모든 학생들에게 발표기회를 최소한 3번은 주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2분, 5분, 10분 말하는 것을 인지하면서 말한다. 학생들 전체가 말할 때는 항상 내가 먼저 시작하고, 학생들이 그렇게 하도록 한다. 중간에 길게 말하는 성도가 있으면, 중간 즈음에 잘라야한다.
모든 부서원이 말하는 방식으로 부서모임을 하는 경우 부서가 금방 살아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모두 말하고 싶고, 그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져서다. 반대로 생각하면, 1명이 길게 말하면 대부분 그것을 의무적으로 듣는다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 청중이 듣고 싶은 것을 상호 조율하면서, 말하는 것을 조정하는 것이 지혜다. 이것도 언어의 상황의존성이다. 공개모임에서 말할 때는 절대로 빠르게, 짧게 하는 것이다.
광고시간도 길면 절대 안좋다. 매주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데, 사회자는 그것을 거의 동일하게 낭독하는 경우가 많다. 그 시간이 10분이다. 10분이면, 나는 책을 3권 출간한다. 성도가 100명이면, 1000분이다. 엄청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다. 초단위로 체크하면서 사회자는 광고를 해야한다. 광고시간에 느슨해지면 성도는 금새 지루하게 느낀다. 이것도 언어의 상황의존성이다. 청중이 있을 때는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빠르게 하는 것이다.
대표기도의 경우, 정말로 많이 연습해야한다. ‘나는’이라는 화법을 절대로 쓰면 안된다. ‘우리가’로 기도를 해야한다. 대표기도자로서 반드시 지켜야할 첫 번째 규칙이다. 기도는 짧은 문장으로 하는 것인데, 길게 설교하듯이 하는 사람이 많다. 몰라서 그런 것이다. 설교문을 그대로 발췌해서 하려고 하니 안되는 것이다. 평소 자신이 사용하는 어법으로 문장을 적어야하고, 예배시간에 맞게, 그 주 설교주제에 맞게 핵심적으로 넣으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다. 단지, 적어서 하면 안 좋다. 적으면 읽게 되고, 읽으면 감동이 없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와서 입을 벌리는 사람이 있다. 몰라서 그런 것이다. 대략 줄거리(굵직한 핵심 단어들, 설교제목 등등)를 적어서 밑에 놔둬야한다. 만약 기도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어쩔 것인가? 그때는 얼른 밑을 참고해서 방향을 잡아야한다. 혼자서 기도할 때는 말문이 막혀도 1분동안 묵상할 수 있지만, 대표기도를 하는데 1분동안 가만히 있으면 이것은 낭패다. (내가 대표기도를 해본 적은 없다. 언어의 상황의존성에 입각해서 서술한 것이다. 참고할 부분만 참고하면 된다.)
언어는 이처럼 상황에 따라 변모한다. 말 한마디에 천냥빚을 갚는다는 명언이 있듯이, 그 어떤 상황에 어떻게 말할지는 각자가 지혜롭게 판단해서 처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도바울이 ‘빈에도 처하고, 부에도 처한다’고 표현했듯이, 모든 상황에 처하면서 경험을 통해 그 지혜를 얻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