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일말씀 핵심은 ‘단장’(丹粧)이다.
“지구는 하나님이다”고 그가 말씀했다. 상징이며, 믿음으로 실체다. 지구를 축소하면 교회는 곧 하나님의 몸이다. 이는 이론이 아니고, 믿음으로 실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몸된 성전이다”고 또한 말씀했다. 이 모든 말씀을 들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진정 깊게 깨달았다. 그렇게 반드시 살리라. 평생!!!
월명동에 가면, 그의 손을 만져야 만난 것으로 정의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월명동 문턱바위를 넘으면 그를 만났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니,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연결되어서 그렇다. 가령, 우체국과 전화가 없었을 때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선물을 전해줘야 그것이 실체였으나, 우체국이 생기면서 우체국에 편지와 선물을 보내면 바로 전달된다.
그를 1m 앞에서 직접 만났다고 하자. 그때 말이 오고간다. 결국 들리는 것은 말이고, 악수를 한다고 해도 접촉의 느낌은 대략 2~3초다. 이것이 만남의 본질인가? 말은 언어요, 소리요, 공기를 통해 전달된다. 그처럼 그의 모습은 빛을 통해서 이미 전달되니, 말과 행동은 속성이 같다. 보는 것과 들리는 것은 모두 만나는 것이다. 악수의 접촉은 손을 만지는 것인데, 손과 연결된 것은 무수한 작품들이며, 월명동은 그의 사상을 펼친 작품세계로서 ‘몸’과 같다. 수많은 사연은 흔적의 발자취들이요, 약수는 진실한 사랑의 선물이다. 왜 꼭 그가 물을 떠서 줘야 그가 준 약수라고 생각할까? 이런 생각에 갇힌 자는 큰 것을 못 본다. 자신이 손으로 떠서 마셔도 그가 마시도록 허락했으니, 그의 선물인 것이다. 이것이 신본주의적 생각이 아닐까?
오늘 전세계는 그를 보았다. 그를 직접 만나서 본 것이라고 믿는 자들은 월명동에서 봐야 그를 봤다고 생각할 것이다. 2가지 모두 그를 본 것이다.
나는 10년 넘게 언론활동을 해왔다. 그를 증거하고, 월명동을 소개하는 수천편의 글을 썼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아무 상관이 없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꾸미기, 단장하기, 가꾸기”는 곧 홍보하기와 연결됨을 알게 됐다. 향후 10년 동안 더욱 열심히 진실되게 행하리라.
언어학 이론에 화행이론이 있다. 화행이론은 말(話)과 행동(行動)은 연결된다는 이론이다. 화행(話行)이론이 타당한 이유는 말이 곧 행위를 발생해서다. 스위치를 켜면, 형광등에 불이 들어온다. 둘은 전혀 다른 객체인데, 스위치의 움직임으로 형광등에 불이 들어온다. 이처럼 말과 행동은 전혀 다른 객체이지만, 상호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현대 언어학은 언어를 언어로만 연구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론은 사실상 현대과학에서 주장되는 빛의 파동설과도 연결된다. 뉴튼의 고전 물리학에서 빛은 입자라고 했으나, 빛의 파동성이 발견되면서 빛은 입자면서 파동이라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듯, ‘말도 행동이다’는 이론이 나온다. 정반합의 변증법이 새롭게 적용되는 것이다.
군대에서 사령관이 ‘공격’을 명령하면, 그 말이 군대를 움직이고, 군인은 적진속에 폭탄을 들고 뛰어들며, 전사자(戰死者)와 공훈자(功勳者)와 포로자가 발생하며, 국가는 전쟁에 휩싸인다. ‘공격’의 말 한마디가 세계에 폭풍을 몰고 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나를 비난하는 책은 쓰레기다”라고 적으니,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트위터의 문장이 사람들을 서점으로 불러오는 영향을 미쳤다. 말이 곧 행위로 나타난다. 어머니가 “밥먹자”라고 하니, 아들이 방에서 나와 함께 밥을 먹는다. ‘밥먹자’는 말이 아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말과 행동은 이처럼 따로 떨어뜨릴 수 없는 존재다. 머리와 몸을 따로 떼서 생각할 수 없듯 그렇다. 물리학에서는 객체를 분리해서 연구할 수 있으나, 생물학에서는 객체의 분리는 불가능하다. 연결된 객체를 분리하는 그 순간 생명은 죽기 때문이다. 그처럼 말과 행동은 상호 연결된 유기체인데, 언어를 언어로만 연구하는 고전 언어학은 생활과 거리감이 멀다.
이와 관련해 정명석 목사님은 2018. 6. 16. 토. 새벽말씀에서 “언어는 생활속에서 배우는 것이다. 외국어를 이론으로만 교실에서 배우는 것은 지겹고 힘들다. 생활속에서 사람을 사귀며, 쉽게 초근초근 배워야 살아있는 언어를 익힐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언어와 생활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화행이론은 영적인 의미로 ‘기도는 일이다’는 말씀과 연결된다. 기도의 말이 하나님께 전달되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니, 기도는 곧 일이다. 가령, 미투운동을 보면, 아주 사소한 사건이 전세계 문화예술계와 정치세계의 지형을 변경시켰다. 촛불집회의 응집과 외침이 정권을 교체했다. 종교적 사명자는 은밀함속에서 민족과 세계를 기도함으로 죽을 운명에서 살아날 상황으로 판세를 바꾸었다. 모두 ‘간절한 언어’를 통해서 세상이 바뀐다.
화행이론의 이치를 깊게 깨달으면, 살아가는 삶이 보다 윤택해지고, 포근해지고, 마음이 넓어진다.
나는 언론인으로 살다보니 낯선 전화를 많이 받는다. 3~4년전 나는 모든 전화를 응대했고,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은 모두 만났다. 평범한 시민들은 모두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기사가 되길 원했다. 만나면, 보통 3~4시간이다. 그러한 많은 만남을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많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목적은 목적이다’는 잠언 말씀의 근본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만나는 이유가 ‘기사’인데, 기사를 쓰려면 자료를 보내주면 되는데, 꼭 나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만나보면, 대부분 횡설수설이다. 그렇게 3~4시간을 소비하면, 정작 기사쓸 시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마다 나는 “기사보다는 하소연할 신문고가 필요한 것인가?”라고 나는 생각했다. 거봉 포도를 사서 먹으면, 거봉 포도 나무를 재배하지 않아도 그 결과를 얻는 것이다. 이런 이치를 깨달으면, 한계상황을 탈출하는 인식의 전환이 가능하다.
많은 사람이 그를 직접 만나 멘토링을 받고 싶어한다. 멘토링을 받고 싶은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1:1로 만나기 위함인가? 혹은 정말로 간절히 변화하고 싶어서인가? 변화하고 싶다면, 만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깊게 깨닫게 하신다. 간절하면, 말씀이 멘토링으로 작용한다. 또한, ‘말’은 숫자의 제한이 없다. 영원한 글과 달리, 말은 녹음하지 않으면 수명이 약해서 금방 사라진다. 말은 공의롭게 듣는 모든 사람에게 전달된다. 자신의 고막에 전달되는 그 음성은 자신에게만 전달되는 그의 음성이다. 직접 만나서 듣는 것도 같은 음성이다. 이 개념을 가져야, 전체속에서 개인의 만남을 이룰 수 있다.
나는 2017년 6월 16일 월명동에 방문해서, 그와 악수를 나누지 못했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가 나를 보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못 만났는가? ‘만남’의 정의가 신체적 접촉과 지근 거리에서 대화로 국한다면, 월명동에서 그를 만난 사람은 몇몇에 불과할 것이다. 신체적 접촉을 ‘만남의 본질’로 정의한다면, 맹자는 공자를 어찌 만났고,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어찌 만났고, 우리는 하나님을 어찌 만나는가? 악수를 할 수 있으면 너무 너무 너무 좋겠지만, 시대가 달라졌으면 손의 행함을 쳐다봄으로, 화동의 악수를 한 것이다. 그의 발이 움직이는 행동을 따라감으로 그와 연결된 것이다. 그의 말이 들림으로 직접 만난 것이다. 약수를 마심으로 그의 마음을 받은 것이다. 월명동 성자바위를 만짐으로 믿음으로 성자를 만난 것이다. 손을 만지면 만난 것이듯, 상징은 손과 같아서 만지면 만난 것이다. 실체와 상징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숙지해야할 핵심 키워드다. 직접 만났을 때는 만나서 대화를 나누지만, 멀리서 만날 때는 몸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공간이 떨어져 안 보이면 카톡으로 만나고, 편지로 만나는 것이다. 상징의 눈을 뜨지 못한 자들은 실체를 못한 모든 삶이 곤고함에 빠지게 된다. 상징의 눈을 뜨면,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주는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대제상 뒤뜰에서 하잖은 여종의 질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여종앞에서 부인한 사건도 대제사장 앞에서 부인한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연결된 개념이라서 그렇다. 직접 만나야 만나는 것이라면, 계집종 앞에서 부인한 것이 무슨 큰 일이라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으로 남겼을까? 상징으로서 여종이 대제사장의 수족, 세상편의 대표로서 물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부인한 것은 결국 세상을 향해 예수님을 부인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국가대표가 싸우지만, 중계방송을 통해 모든 국민이 쳐다보듯 그러함을 인식한다면, 상징이 곧 실체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머리카락이 머리에 연결되어 있듯이, 작품은 행위로서 작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곧 ‘상징의 눈’을 뜬 것이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데 나았듯이, 옷이 곧 몸에 속한다면, 작품도 신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