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單語)는 그 뜻을 정확히 알아야 개념이 잡힌다. 특히, 한자어는 한자의 근본뜻으로 풀어야 의미가 정확하다. 신앙(信仰)과 신학(神學)을 한자어로 구분하지 않으면, ‘신’의 발음이 같으니까, 신앙(信仰)도 신앙(神仰)으로 착각할 수 있다. 물론, 신앙(神仰)으로 착각해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의사(義士)와 의사(醫師)는 전혀 다르다. 안중근 의사(義士)의 직업을 한의사(韓醫師)로 알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 한자어가 아닌, 소리글자로만 인식하면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한자를 뜻글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 속뜻을 글자 형상에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얼마전, 누군가 “이번 선거에서 A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라고 했다. 나는 “웬 국회의원??”라고 대답했지만, 그는 국회의원과 시의원과 구의원과 시장을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이번 선거는 지방선거로서, 지방자치제도에 따라서 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는 총선거라고 불리고, 대통령 선거는 대선이라고 불리고, 지방선거는 각 지자체별 시장과 지자체 시의회와 구의회의 의원들을 뽑는 선거다. 국회의원과 시의원과 구의원은 대통령-장관-구청장의 직급처럼 차이가 있다. 대기업-중소기업-소상공인의 차이와 같다. 대기업도 사장, 중소기업도 사장, 소상공인도 사장이지만,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국회의원도 ‘의원님’이라고 불리고, 시의원도 ‘의원님’이라고 불리고, ‘구의원’도 ‘의원님’이라고 불리는데, 셋을 세워놓으면 해와 달과 별처럼, 차이가 있다. 최소한 누가 더 높은 직급인지 구분하는 것은 상식이다. 해달별중에 누가 더 밝은지 구분하는 것은 눈 뜬 자로서 상식이듯 그렇다. 정치봉사가 안되려면, 국회의원과 시의원과 구의원은 구분해야한다.
주님의 개념을 잘 알아야한다. 주님은 ‘주’(主)에 존칭접미사 ‘님’이 붙었다. ‘주님’은 예수님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지만, 본래 뜻은 ‘주’를 높여 부른 표현이다. 주는 곧 주인(主人)이다. 주인을 조금 높이면 주인공(主人公)이다. 주, 주인, 주인공, 주님은 모두 같은 개념이다.
‘주’는 곧 주권(主權)을 갖고, 주인을 말한다. 건물주(建物主)는 곧 건물의 소유주를 말한다. 차주(車主)는 차의 주인이다. 고용주(雇用主)는 고용한 주인이다. 지주(地主)는 땅 주인이다. 교주(敎主)는 종교의 주인이다. 회사의 주인은 사주(社主)라고 하지 않고, 사장(社長)이라고 한다. 회사에도 주인이 있듯이, 종교에도 주인이 있다. 기독교의 주인은 곧 예수님이다. ‘기독교 교주’를 줄여서 ‘주’라고 부르고, 존칭법으로 ‘주님’이라고 한다. 집주인의 힘이 너무 강해서, 갑질에 시달리는 세입자는 집주인과 통화를 하면서 종종 “집주인님”이라고 발언하기도 한다. 집주인의 힘이 그만큼 세서 그렇다.
구원주와 구세주는 개념에서 차이가 있다. 구원주(救援主)는 각 개인을 구제하고 후원하는 주인공의 개념이다. 구세주(救世主)는 세상을 구원한 주인공이다. ‘구원’은 구원투수(救援投手)에도 사용된다. 구제와 후원, 구제와 지원의 개념이다. 구원은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 사람을 꺼내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최소한 취직문제, 입시문제, 집문제, 알바문제, 노조문제 등은 아닐 것이다. 구원주와 구세주가 사용되는 배경은 종교이므로, 영적인 문제해결을 전제로 한다.
나는 내 인생의 구원주를 만났다. 또한, 나는 시대의 구세주를 만났다.
위 두 문장에서 구원주는 곧 각 개인의 영혼문제를 해결해주는 사명자가 구원주가 된다. 각 개인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구원주가 다른 사람의 구원주가 안 될 수도 있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나라여서 그렇고, 각 개인은 신앙의 자유가 있어서 그렇다. 불교는 불교에서, 이슬람은 이슬람에서, 무신론은 무신론에서 각자 자신의 영혼문제를 해결할 구원주를 찾을 것이다.
구세주(救世主)는 세상을 구원한 주인공이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구원주’로서 ‘구세주’로 믿는다. 예수님이 과연 세상을 구원했는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에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이뤘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1948년 5월 14일에 이뤄졌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는가? 로마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종교가 되어서 그러한가?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는다면, 십자가에 처한 그 당시 예수님은 구세주가 아니라는 것이 된다. 구세주(救世主)라고 고백할 때, ‘세상’의 개념이 바로 영적 세상을 말한다. 세상의 개념에서 혼동이 생기면, 유대인들처럼 착각을 일으킨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에서 해방시킬 구세주를 기다렸는데, 예수님은 구약의 감옥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는 구세주였다. 종교적 세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아담의 범죄로 구약에 갇혔고, 그 구약에서 구원할 자가 바로 구세주였던 것이다. 예수님이 구세주인 것은 바로 구약의 예언을 이룸으로 신약의 문을 열어서 그렇다. 정치상황은 종교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근본은 영적인 문제인 것이다.
누군가 구세주로서 다시 온다면, 그는 반드시 신약에서 성약의 문을 열 것이다. 신약시대에 구세주를 기다리는 근본 이유는 신약의 문제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이다. 구약을 구원해서 신약이 되었고, 신약을 구원해서 성약이 된다. 성약(成約)은 ‘약속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구약앞에 신약이 ‘성약’으로서 신약이다. 신약은 구약의 약속을 이룬 시대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다시 예언을 했고, 특히 다니엘의 예언을 다시 예언하면서 성약시대의 존재를 말씀했다. 신약성경의 모든 예언이 이뤄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것은 신약에서 성약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고, 성약시대를 살고 있다면, 그것은 신약에서 성약으로 바뀌었으니, 구세주가 왔다는 증거이다.
다니엘의 예언은 이스라엘 독립이다. 이스라엘은 1948. 5. 14 독립되었다. 예언이 이뤄졌으니, 2천년 전 예수님처럼 이 시대도 구세주의 탄생이 그 즈음 이미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대한민국의 독립 시기가 1948년으로 같다. 참으로 묘한 우연의 일치다. (다니엘의 예언 성취는 기독교복음선교회의 한때 두때 반때 성경공부를 통해 깊게 배울 수 있다.)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AD와 BC로 구분되듯, 신약과 성약을 나누는 구세주의 탄생은 지구촌 역사에서 엄청난 분기점을 예고할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인류문명의 가장 극적인 전환점을 꼽으라면 언제일까? 바로 1945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말이다. 더불어 대한민국은 그때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되었다. 구세주는 영적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태어나는데, 영적 세상이 구원되면, 그와 맞물려 육적 세상도 변혁되고 발전된다.어둠이 물러갔다면, 그것은 태양이 떴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래서 1945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담의 범죄로 아담에 속한 그의 후손은 모두 죄의 종이 되었고, 하나님과 주종관계로 살았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면서 하나님과 관계를 부자관계로 발전시켰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종급 종교 세상을 아들급 종교 세상으로 차원을 높였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아들급 종교 세상을 신부급 종교 세상으로 차원을 높인다면, 그러한 종교시대를 선포한다면, 실제로 하나님과 관계가 정립된다면, 그가 바로 신약에서 예언한 구세주일 것이다. 신약에서 예언된 구세주를 흔히 ‘재림주’(再臨主)라고 한다. 재림주는 다시 임재하는 주님이다. 신약의 아들 차원을 더 높임으로 새로운 종교시대를 알려주는 사명자가 바로 ‘성약의 구세주’인 것이다. 구세주(救世主)에서 세상 세(世)를 잘못 해석하면, 사람들은 세상 정치인을 구세주로 착각하게 된다. 트럼프와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이 신약에서 예언한 그 구세주가 될 수 없는 것은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서 그렇다. 구세주는 최소한 종교 지도자여야 하고, 더불어 신약에 속해서 살아야한다. 예수님이 구약에 속해서 탄생함으로, 구약에서 첫 번째로 부활하여 첫 신약인이 되었듯이, 신약에서 예언된 구세주도 신약에서 첫 번째로 부활하여 첫 성약인이 되는 것이다.
구원주는 각 인생마다 모두 다를 수 있다. 인류가 70억명이 넘는데, 수많은 인생들의 육적,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각자의 인생에게 달려있다. 반면, 구세주는 오직 1명이다. 대통령이 각 나라마다 1명이듯, 구세주는 시대마다 오직 1명이다. 하나님의 세상은 구약과 신약과 성약 3개 밖에 없고, 신약이 시작하면서 구약은 끝났고, 성약이 시작하면 신약도 끝난다. 구약의 시대를 구원해 신약의 문을 연 인물이 곧 예수님이고, 이제 신약의 시대를 구원해 성약의 문을 여는 인물이 바로 성약의 주인으로서 구세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