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댓글마감 2:50 문자를 2:49에 확인했다. 씻고 나와서 웬지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어서 켰더니, 문자가 확 당겼다. 그 순간 2:50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그 찰나의 포착에 내 손가락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4개의 글자 ‘아멘!!’을 보냈다. 완벽한 반응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으랴!! 사연편지가 이 새벽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새벽버스를 타본 사람은 안다. 그 열정과 희망의 눈빛에 대해, 좌석은 언제나 여유롭고, 눈빛은 졸립지 않다. 하루를 살아내겠다는 생명력은 새벽버스와 생선을 파는 시장에 가면 느낄 수 있다. 하물며 새벽기도 시간이랴!!
새벽기도 시간은 아무도 없는 골목에 신사임당 지폐가 떨어져 있는 것과 같다. 주인없는 돈은 먼저 발견한 자가 주인이다. 새벽기도 시간은 그와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눈앞에서 사진을 찍자며, 악수를 하자며 청하는 것과 같다. 대통령이 되기 전, 후보시절에는 그러했다. 새벽기도는 대통령을 후보처럼 맘껏 만나는 것과 같다. 인터넷 화폐(가상화폐)의 금덩이로 알려진 비트코인이 10년전 피자 1판 가격에 팔렸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여의도 땅값이 강원도 감자밭 가격이었던 적이 있었다. 새벽기도는 여의도 땅을 감자밭 가격에 사는 기회를 얻는 것과 같다.
오늘도 새벽별이 사랑스럽게 떴다.
말씀의 핵심은 “말씀의 실현”이다. 그가 나의 그가 되신 것, 그가 내 인생의 멘토라는 것, 그의 말씀을 날마다 들을 수 있다는 것, 아!!! 그것은 청와대에 초청받은 것의 1만배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다. 정말로 그러하다.
그가 말씀했다. “말씀은 아멘 아멘 하며, 마음으로 기쁜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그날 실행되는 것을 알아야한다. 특히 새벽말씀은 그날 이뤄질 일에 대해 성령님이 알려주시는 것이다”
어제 있었던 사연을 말씀하시는데, 역시 그는 그다. 말씀의 주인공은 그 말씀을 이루는 능력과 지혜가 탁월하다. ‘넓게와 높게’를 실체로 이루시며 살아내신 어제의 사건을 잔잔하게 전하시면서, “시야를 넓히고, 그 중에서 보다 좋은 것을 고르며, 필요없는 일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차원 높게 사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택시를 타고 교회에 왔다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일은 이제 즐거운 패턴이 되었다. 지속적으로 살아가리라. 기도하면서 몇가지 일을 놓고 간절히 간구했다. “들어주리라”는 약속이 마음에 느껴졌다. 방청소, 책청소, 생각청소를 했던 어제, 방도 마음도 넓어졌다. 참 잘했던 것 같다. 잡초는 밭이나 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만하면, 방안 책상에 금새 잡초처럼 책들이 어지럽다. 가지치기하듯 청소를 해야 복잡(複雜)한 잡초(雜草)가 사라진다.
그를 가까이 보길 누구나 원한다. 지혜자는 망원경으로 그를 가까이 본다. 목적이 목적이다. 모두가 그를 가까이 보는 것은 현실로 불가능하다. 당연한 상식이다. 피자 1판을 100명이 배부르게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4~5조각으로 나뉠 뿐이다. 4~5명이 그를 둘러싸면 그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항상 청중을 멀리 두고 마이크를 잡으신다. 야구중계를 하시는 그의 모습은 곧 얼굴과 말을 모두에게 보이심이다. 얼굴은 얼이 담긴 거울의 줄임말이다. 혹은 얼이 담긴 동굴의 의미도 된다. 얼은 곧 정신이다. 얼굴은 정신이 나타나는 곳이다. 얼굴이 ‘얼의 거울’이라면, 그의 정신이 반영된 그의 모든 작품이 곧 그의 얼굴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의 얼굴이다. 신체의 얼굴은 정신을 나타내지 못하지만, 행위의 얼굴은 마음을 나타낸다. 특히 말은 얼굴에서 나온 언어행위다. 말을 듣는 것이 곧 얼굴을 본 것이다.
모두 그와 악수를 하고 싶어한다. 악수(握手)는 꽉 쥘 악(握)에 손 수(手)다.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악수만큼 좋은 것이 없지만, 정치인들은 악수하다가 손에 쥐가 난다. 그가 날마다 우리에게 악수를 해주시면, 10년도 부족할 것이다. 손은 망가질 것이다. 성자바위 앞쪽만 언저리가 수만명이 수백만번 만지니 반질반질해지는데, 하물며 사람의 손이랴!!! 악수는 손을 만지는 것이다. 그의 손으로 만든 월명동은 그의 지문이 묻은 사랑의 흔적들이다. 잔디밭은 그의 손바닥과 같고, 운동장은 그의 발바닥과 같고, 곳곳에 세워진 돌들은 그의 손가락과 같다. 그의 손을 통해 건축했음은 모두가 겪어서 아는 바이다. 월명동에 도착해 바위를 만지며, 바위에 앉은 것이 곧 그의 손바닥에 있는 것인데, 더 무슨 악수가 필요한가!!! 이제는 인식을 달리해야한다. 큰 책 만물로 하나님을 배우신 그의 사상을 우리가 본받는다면, 이제는 완전히 달라져야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모두가 경기에 참여하길 원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10년이 걸려도 못할 것이다. 몸은 지칠 것이다. 야구를 하려고 야구 선수들이 집결했다. 그때 그가 보여주신 모습은 야구중계였다. 프로야구 중계방송은 시청자까지 그 경기에 포함한다는 의미가 전제된다. 울타리도 집의 영역이고, 국경선도 국가에 포함된다. 청중은 결코 울타리 밖이 아니다. 그는 월명동에 오지 못한 성도들까지 사연편지와 생방송으로 챙기며 함께 하길 원하시는데, 하물며 월명동에서 그와 함께 하는 청중이랴!!! 시합을 같이 못했다고, 악수를 못했다고, 직접 선물을 못 드렸다고, 1m에서 그와 인사를 못했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막았다고, 그가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별별별 잡생각을 하는 사람은 인간 까마귀다. 오석(烏石)도 아름답게 자태를 뽑내는데, 인간들이 왜 그러나?
그가 비오는 날 호떡을 나눠주실 때, 나도 군침이 넘어갔다. 그가 모임을 마치자 마자, 나는 얼른 부침개를 사먹었다. 속으로 “이것은 그가 사주신 것이다”라고 믿었다. 그때 그것을 판 사람이 내게 말하길, “그 부침개는 쌤을 위해 빚은 특별한 반죽으로 만든 거예요”라고 살짝 말해줬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되는데, 왜 꼭 그에게 호떡을 받아야한다는 칭얼거림의 신앙생활을 아직도 하는지 참 알쏭달쏭하다.
“하나님은 지구와 같다”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몸에 붙어 살고 있다. 얼마나 행복한가? 그와 같이, 월명동 문턱바위를 넘으면 이미 그의 품속에 안긴 것이다. 더 무엇이 필요하랴!! 약수를 마신다면, 그것은 사랑의 마음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다. 더 무엇이 필요하랴!! 지구에 살면서 지구가 둥근 것과 움직이는 것을 모르듯, 월명동에 있으면서 그의 품을 알지 못한다. 있다보면, 가끔 1m 근처에서 그를 볼 수도 있다. 그때는 성령과 함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신비한 상징의 세계인가? 사도바울이 고백하길, “누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할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고 했다. 우리가 그의 사상을 가졌으면 충분히 그의 수족이니, 각자 오른손으로 왼손을 맞잡으면 그와 악수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한다. 그렇게 살다보면, 실체로 그와 악수할 날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