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웃기는 사람은 먼저 웃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먼저 웃으면, 그 웃음은 전달되지 않는다. 웃는 사연이 전달되지 않아서다. 웃는다고 따라 웃으면 그것은 바보다. 웃음은 내면의 표현이라서 그렇다. 사연도 모르고 따라서 무조건 웃으면 그것은 하회탈 웃음이다.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는 ‘인식의 단절’ 때문이다. 유럽의 저명한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체계이론을 집대성하면서, “사람의 의식구조는 상호 독립체계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은 생각의 영역이 각각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집과 방에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지만, 생각의 내면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인식의 체계이론의 핵심이다.
내가 사람을 많이 만날 때는 하루에 수백명을 만났었다. 학교를 옮겨다니면서 아이들을 보다보니, 이 학생이 이 학생같고, 저 학생이 저 학생같다. 학생들은 내게 항상 묻는다. “저 알죠?”라고. 그런 질문은 그 학생이 나를 잘 알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럼!!”라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잘 모른다. 어찌 내가 알겠는가?
드라마 도깨비에서 지은탁으로 열연한 여주인공 김고은 탤런트는 보기만 해도, 감동적이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드라마 애청자이고, 가끔 까페에서 도깨비 드라마의 명장면이 생각난다. 글을 쓸 때도 도깨비의 대사를 종종 인용하기도 한다. 나는 김고은의 연기를 통해 그 배우를 잘 안다. 그렇다고 내가 김고은 탤런트를 직접 만나서, “저를 알죠?”라고 묻는다면, 그녀는 얼마나 황당할까? 당혹스러울까? 내가 그녀를 알고 있으니, 그녀도 나를 알아야한다고 생각하는 부류는 ‘스토커’가 될 위험이 높다. 지극히 상식인데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나는 하루에 글을 10편, 20편씩 쓰고, 책을 10권씩, 20권씩 출간한다. 기억의 한계용량은 제한적이다.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면, 만난 사람들의 수효가 너무 많아서 어디선가 또 만나면 가물가물하다. 썼던 글도 마찬가지다. 책도 동일하다. 누군가 내게 “저 알죠?”라고 물을 때, 내가 내심 부담감과 당혹감을 느껴서, 나는 그 누구를 만나도 상대가 나를 전혀 모를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한다. 특히, 월명동 그 사람과 관계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흔히 사람들은 “그가 나를 알 것이다. 그가 나를 알아주길 원한다. 그가 나를 알아야한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면, 그가 나를 아시나? 그런 물음표가 든다. 지극히 당연한 인식의 과정인데, 그가 자신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큰 충격을 받기도 한다. 참, 미련스럽다. 내가 김고은 탤런트를 찾아가서, 내가 그녀를 잘 아니, 그녀도 나를 잘 알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가 십자가 사건을 겪는 동안 편지로서 내가 독보적으로 보냈을 것이다. 덕분에 몇 번의 답장을 받기도 했다. 일주일에 1통, 또는 2통을 꼬박꼬박 보냈다. 최소 500통 넘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추산된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쌤이 너를 아니?”라고. 내가 대답했다. “알겠니?”라고. 그가 나를 모른다고 믿으니, 만사가 편하다. 편지를 500통 보냈는데, 그가 나를 몰라주면 어쩌나라고 생각하면 정말로 부담스럽고, 뒤숭생숭한다.
물론, 사람으로서 그가 나의 은밀한 사연의 비밀을 결코 알 수가 없는데 아실 때가 있다. 정말로 그러하실 때가 있다. 그때는 신적 능력이 임해서 아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믿는 것이다. 신령하게 아시는 것과 인식으로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는 점심에 냉면을 드시든, 콩국수를 드시든, 국밥을 드시든, 어떠한 식사를 하신다. 그처럼 우리도 그러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다. 오늘 그가 사연편지로 소식을 알려주지 않으면, 그의 생활을 알 길이 전혀 없다. 그처럼 그는 우리의 생활에 대해, 직장에 대해, 가족에 대해 아실 수가 없다. 지극히 상식이다.
안다는 것은 2가지 종류가 있다.
학교에서 모든 학생은 담임교사가 자신을 알아주길 바란다. 과연 담임교사가 학생의 모든 것을 알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업무도 많고, 신경쓸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교사와 친밀감을 갖는 것, 이것은 보통의 ‘앎’이다. ‘앎의 깊이’를 더하면, 교사가 알아주도록 살아가는 것이다. 교사가 알아주는 단계는 친밀감을 넘어선다. 교사가 원하는 것을 하는 학생은 교사가 인정한다. 예습하고, 학교 공동체를 위해서 해야할 일을 하고, 수업 참여도를 높이는 것, 그것이다. 수업시간에 질문을 잘하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성적도 월등하면, 교사가 특별히 눈여겨 볼 것이다. 마치 채색옷을 입은 요셉처럼!!!
그와 같다. 그가 나를 알까? 이런 생각이 들거든, 그가 나를 알아주도록 그가 원하는 일을 하면 된다. 사람의 마음은 누구라도 ‘조건의 노크’를 두드리는 것이다. 합당하면 문을 열어준다. 자물쇠는 열쇠로 여는 것이다. 열쇠는 곧 ‘합당한 조건’이다. 그가 새벽에 만나자고 했으면, 새벽에 정장차림으로 그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렇게 행하면, 그가 ‘새벽기도를 행한 자’로서 알아주신다. 만사의 모든 일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