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소통(疏通)은 21C 아이콘이다. 레이건, 오바마, 트럼프, 문재인 대통령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소통이다. 레이건 대통령은 타고난 목소리로 국민들을 향해 기자회견을 함으로 지지율을 급상승시킨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타고난 언어구사력을 지녔다. 오바마 대통령은 토론의 달인으로서 대화하는 소통을 구사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의 달인으로서 ‘트위터’를 통해 새로운 소통전략을 구사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북한과 미국을 연결하는 소통의 실력을 발휘했다. 소통은 곧 연결이다.
인터넷과 아이폰은 사람의 뇌를 모두 연결했다. 이것만 보더라도 지금은 ‘소통의 시대’이다. 아이폰의 시작은 19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티브 잡스는 1977년 개인PC를 만들어, 업계를 놀라게 했다. 컴퓨터는 그때부터 점점점 작아지기 시작했고, 전화기도 역시 점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컴퓨터와 전화기가 점점점 작아지면서 ‘스마트폰’으로 둘이 합쳐진 것이다. 그때가 2007년이다. 스마트폰은 곧 모든 사람과 모든 정보와 연결되므로 소통하는 최첨단 기계다.
정명석 목사님은 소통의 리더쉽을 발휘한다. 1999년과 전혀 새로운 소통의 리더쉽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지난 4달의 삶속에서 나는 기독교복음선교회의 공식 회원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근접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몇초 가량 본 적이 있었는데, 세월의 흔적이 깊게 보였으나, 온화한 미소가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통”의 눈을 뜨면, 만사가 편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독자중에 목회를 하고 있는 성직자가 있다면, ‘소통’의 두 글자가 곧 ‘목회의 핵심’인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교회(敎會)도 결국 만날 회(會)가 있다. 가르칠 교(敎)는 효(孝)를 가르친다는 의미인데, 孝는 노인(老)과 자녀(子)의 연결로서 역시 소통이다. 한국전통사상의 시작인 ‘홍익인간’(弘益人間)도 널리 인간의 관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이다. 사이 간(間)이 곧 소통의 관계성을 말한다. 소통은 ‘공기’와 같아서, 없어서는 안되는 매개체이다.
정명석 목사님은 정사면체(正四面体)와 같은 입체적 소통의 달인이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정사면체인 정삼각뿔이 ‘불’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는 불과 같은 열정의 소통을 행한다. 정사면체의 입체적 소통은 모든 면에서 소통하는 완벽한 연결구조를 의미한다.
그 언젠가 야구경기에 그가 나타나신 적이 있다. 바위위에 앉으신 그는 마이크를 잡고, 야구중계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가 야구중계의 전문가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는데, 그것은 너무 단편적인 해석이다. 그가 마이크를 잡고서 야구중계를 시작하면서 청중과 선수들이 즉시 연결되었다. 이것이 소통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과 북한을 오고가자 곧바로 북미정상회담이 재추진되는 것과 같다. 야구중계를 하실 때, 야구시합을 준비한 팀이 야구옷을 준비해 왔는데, 그것을 입고 계셨다. 이것도 소통이다. 선수들은 그와 같은 팀이 되었다는 강한 결속력을 갖고, 경기에 열정을 다했다. 청중도, 그도, 누구도 시합하는 두 팀중에 누가 이기느냐에 관심이 없다. 야구라는 운동을 통해서 모두 ‘즐김의 소통’을 누리는 것이다. 그가 일어났다. 야구경기장으로 내려가 야구 배트를 잡았다. 세워진 폴대 위에 야구공을 때리는 것인데, 안타도 치고, 홈런도 때리고, 슬쩍 공을 밀어서 기습번트도 댔다. 그때마다 청중은 환호성을 질렀고, 선수들은 질주했고, 운동장 수비진은 기뻐 뛰었다. 모두가 즐거운 것은 야구때문이 아니다. ‘소통의 연결’이 그를 통해 이뤄져서 그렇다. 청중까지 야구시합에 연결한 것은 소통의 리더쉽이다.
야구중계를 하거나, 야구배트를 잡거나, 그 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바로 코치다. 그는 타석에서 옆으로 비켜서더니, 선수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운동정신을 교육한다. 어깨도 툭툭 만져주면서, 이름도 물어보면서, 선수와 1:1 소통이 바로 진행되고, 코치를 받았다는 그 기쁨에 선수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서 “홈런”을 날린다. 간혹, “뜬공”을 때려서 아웃이 된 선수도 있었지만, 어떤 야유도 없다. 이기기 위한 야구시합이 아니라 즐기기 위한 야구라서 그렇다.
야구운동 하나만 보더라도 이와 같은데, 배구와 탁구와 테니스와 골프와 축구와 농구는 개성적 운동의 소통인 것이다. 야구를 잘해야 야구선수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구를 잘해야 축구운동을 통해 청중들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다. 농구와 탁구도 동일하다. 운동시합을 이기기 위해 눈에 불을 켜는 그런 경쟁구조에는 소통이 존재하기 어렵다. 반면, 소통하기 위해 운동을 하면, 삶이 재밌어진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사귀기 위해서’이고, ‘더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다.
왜 그는 자주 사연편지를 보내실까? 비내리는 날, 우천골프를 마치고, 모든 선수들에게 호떡을 나눠주신 다음, 비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서 천막에서 그가 뭔가를 하셨다. 30분후 사연편지가 도착했다. 카톡으로 월명동에 오지 못한 회원들과 소통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 사연편지를 받고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도록 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사연편지를 화룡점정으로 찍으신 그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예술도 그러하고, 음악도 그러하고, 약수도 그러하고, 월명동도 그러하다. 모두 소통의 아이콘이다. 특히 월명동은 하나님과 사람이 소통할 수 있도록 성전이 꾸며졌다. 야심작이 하나님의 보좌 디자인이라고 말씀하시고, 월명동에 직접 도착하신 다음, “하나님의 의자”를 명확히 지정하신 것, 그때를 기점으로 성도들은 월명동을 방문할 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의식함으로 소통하는 문화가 점점점 자리를 잡고 있다. 성자 조각상, 성자 바위, 성령바위 등등 월명동은 앉아있어도, 걸어가도, 뛰어가도 ‘오직 하나님’이 느껴지도록 되어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자연성전인가!!!
과연 세상의 그 어떤 정치인이, 그 어떤 종교 지도자가 새벽에 말씀을 전하며, 설교원고를 직접 집필하며, 직접 작곡 작사하며, 성도들과 함께 직접 운동하며, 함께 성전을 건축하며, 함께 성전기물로 사용할 조각상을 고르며, 함께 대화하며, 함께 호떡을 나눠 먹으며, 함께 비를 맞으며 노래를 하는가?
상징의 언어로 전체와 소통하는 그가 ‘소통의 대명사’로 내게 있으니, 나는 진정 행복하다. 서로 다른 개성들이 진리로 소통하는 아름다운 이상세계에 내가 존재하니, 진정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