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로국밥은 고달프다.
– 사과 대신 사과즙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순회(巡廻)를 기다리는 자가 있고, 이미 순회를 맞은 자가 있다. 똑같은 교회에서도 서로 나뉜다. 인식의 차이가 이렇게 다르다. 대통령이 마을을 방문하면, 그 마을의 이장을 만났으면, 설령 단체 사진을 찍지 않았어도 마을 전체를 순회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을 방문했으면, 설령 모든 사람과 악수를 안했더라도 모든 집을 들어가지 않았어도 전체를 방문한 것이다. 암스트롱이 달나라에 인류의 발자국을 찍었으면, 달 전체를 돌아보지 않았어도 달나라 전체를 다녀온 것이다. 그가 교회에 순회를 했으면, 각 부서별 모임을 하지 않았어도, 각 개인별 면담을 하지 않았어도 전체를 만난 것이다. 따로 국밥은 없다.
물론 따로 국밥처럼 특별대우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항상 그런 대접을 받을 수도 없고, 단지 몇십초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고등학교때 그의 순회가 순천에서 있었다. 지금은 그냥 어렴풋한 기억밖에 없다. 그가 저녁때 다녀갔는데, 다음날 새벽에 나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교회가 난리가 났었다. 두 부류로 갈렸다. 한쪽은 그를 만났다면서 자랑하는 자, 다른 한 쪽은 그를 만나지 못했다고 통곡하는 자였다. 내가 보기엔 둘 다 육적인 신앙을 하는 자들 같았다. 왜 그런 무식한 신앙을 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옳지 못한 신앙의 문화였다. 설교를 통해 말씀으로 모두 만난 것인데,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져서 만남을 가져야 ‘면담의 사연’으로 기념된다는 그런 인식관!!!
나는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를 순회했으면 이미 부서와 개인을 순회한 것이다. 예수님도 성전으로 기도하는 것과 단상으로 기도하는 것, 제단으로 기도하는 것과 제물로 기도하는 것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했다. 집과 방의 차이를 구분하면, 쉽다. 집이 크다. 방은 작다. 집속에 방이 있는 것이다. 아파트 분양을 받았으면 방도 분양받은 것이다. 그와 같이 그의 말씀을 듣고 실천했으면 이미 그의 육신을 만난 것이다. 왜냐구 묻는다면, 말씀이 자신에게 실천됨으로 육신이 되었으니, 곧 육신을 만난 것이다. 이것이 극한 영적 비밀이다.
두 부류가 있다. 그가 새벽말씀을 전하니, 순회를 맞은 교회가 있고, 순회를 준비하는 교회가 있다. 스마일 표시가 들어오면 이미 순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때론 스마일 표시가 없더라도 순회가 시작되었다고 봐야한다. 세계교회의 동시 순회다. 나는 그가 월명동에서 운동장을 한바퀴 도실 때, 부활 역사의 순회는 지구가 자전하듯 핵심지에서 진행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전반기때는 전국순회를 공전하듯이, 세계를 공전하듯이 직접 갔다면,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서 있는 곳에서 자전하듯이 순회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결국 각자의 인신관으로 날마다 순회를 맞는 사람이 있고, 여전히 순회를 맞지 못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러다가, 새벽말씀의 역사가 끝나면, 새벽순회는 더 이상 없다. 맞은 자는 맞은 것이고, 맞지 못한 자는 못 맞은 것이다.
한중무역박람회에 취재를 간 적이 있다. 최우수 BEST 선정대회를 내가 진행했다. 내가 직접 탐방해서, 취재하고 상을 주는 것이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취재를 해야하니, 눈에 띠는 곳에 들어가서 “최우수 BEST 선정대회를 하는데, 소개 부탁해요?”라고 말하고, 곧바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때 어떤 부스에 들어갔는데, 한 사람은 인터뷰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시큰둥했다. 시큰둥한 사람에게는 내가 말하지 않고, 반응하는 사람은 명함을 받고 다음날 선정증을 줬다. 모든 것은 그렇게 끝난다. 선정증을 받는 것을 본 옆 사람은 그제서야 받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이미 끝난 것이다.
그가 했던 유명한 잠언이 있다. 사과 대신에 사과즙을 받았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사과즙을 받았으면 사과를 받은 것이다. 이 잠언은 정말로 실용적이고, 삶을 윤택하게 한다. 순회의 약속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교회에 직접 방문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마치 하나님이 직접 땅에 오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가 교회에 직접 오시는 순회도 있겠지만, 교회를 직접 보는 인터넷 생중계도 순회다. 인식관을 달리 하면 교회 성도들의 인식도 확 달라진다.
사람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동전은 양면이고, 모든 일은 상대성이다. 작용과 반작용이다. 그가 우리를 보면, 우리도 그를 본다. 그래서 순회인 것이다. 그래서 면담인 것이다. 그래서 만남인 것이다. 그래서 대화인 것이다. 대화(對話)는 서로 마주보면서 말을 나누는 것인데, 그가 말씀하고, 우리는 그 말씀을 적음으로 대답하니, 대화인 것이다. 모든 사건에 대해 인식을 달리하면, 이미 꿈이 실현되고 있고, 곳곳에 약속이 실현되는 보물들이 반짝인다.
PS. 법원은 핸드폰 녹음 금지 정책을 펼친다. 공연장도 동일하다. 존중해야할 정책이다. 법원과 공연장은 시민들과 관객들에게 문화교육을 실시해서, 그 양심과 인격에 녹음금지의 자율권을 준다. 모든 교회가 이런 문화를 익힐 필요가 있다. 녹음금지를 감시하는 눈빛은 매섭다.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에 감시의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지도자가 돌아다니면, 마음이 그냥 불안해진다. 그 누가 감시받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러한 불편함이 계속 쌓이면 교회는 경직된다. 경직되면, 사랑이 점점점 식어진다. 조심해야할 일인데, 잘 모르는 것 같다. 매번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다. 그저 관용으로 이해하고 살아야지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