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평의 누운 돌과 수직의 세운 돌의 조화
– 동물에서 사람으로, 사람에서 진리로 진화
[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진화론(進化論)은 되어진 결과를 인과적으로 정리한 학문이다. 원숭이에서 사람이 진화했다는 이론은 ‘무한대의 상상력’으로 그럴듯해 보이는데, 입증과정은 비약이 심하다. 대신, 진화론에서 얻을 중요한 교훈이 있다. 바로 ‘발전의 방향’이다.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원숭이와 사람의 분명한 차이는 ‘수직의 직립보행’이다. 진화론적 공간심리학은 ‘직립보행’과 연결된다.
사람은 태어나면, 동물과 거의 흡사하다. 생김새만 다를 뿐 움직이는 모습은 민달팽이처럼 기어 다닌다. 동물의 새끼처럼 그렇게 엉금엉금 다닌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인식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배밀이를 무한 반복하면서 ‘앉음의 변화’를 이루고, 이제 엉덩이를 땅에서 거뜬히 일어나 ‘첫 걸음’을 뒤뚱뒤뚱 시작하면, 부모는 탄성을 지른다. 아마도 창조주도 인간의 직립보행을 보고 그러했으리라.
사람은 하루를 살면서, 새벽에 수직의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저녁에 책상에 앉아서 하루를 반성하며,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수평의 삶을 시작한다. 사람은 날마다 수평과 수직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동물과 사람의 분명한 차이가 여기에 있다. 모든 동물은 수평의 생활을 하지만, 사람은 수평과 수직의 생활을 반복하면서 살아간다. 수직은 곧 ‘세움’이며, 이는 중력의 방향이다. 중력은 만유인력이며, 자연의 섭리요, ‘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시 공동체는 ‘모두 함께 나눠먹는 평등의 사회’라면서, ‘원시사회로 회귀’를 외친다. 참 미련스럽다. 진화론적이지 않고, 역행이다. 원시사회에서 무슨 볼 것이 있단 말인가? 인류문명은 발전했고, 그 방향은 ‘평등에서 계급의 질서쪽’이다. 식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사람으로 생명체가 진화했듯이 인류문명의 사회가 진화한 방향은 ‘분화’와 ‘계급’이다. 계급의 다른 말은 ‘분화와 질서’이다. 수평으로 사는 동물이 수직으로 사는 사람으로 진화했듯이, (종의 진화는 아니다. 창조적 종의 차원 진화이다.) 평등사회에서 수직사회로 문명은 발전했다. 수직사회는 곧 질서이며, 왕권통치를 의미한다.
왕권통치도 점점점 민주주의 제도로 진화했다. 법치국가는 법이 왕을 대신했고, 통치 시스템은 중앙집권적 ‘수직형 공동체’이다. 모든 국가가 동일하다. 공산주의도 ‘평등’을 외치지만, 질서를 위해서는 ‘법’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것은 ‘수직형 통치 시스템’이다.
월명동 돌조경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확실히 살아있어 생명력이 넘친다. 야심작을 보아도 그렇고, 기도동산을 보아도 그렇고, 북편 돌조경이나 성령 폭포를 보아도 그렇다. 생동감과 생명력이 살아 숨쉰다. 신의 작품이라고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건축기법이 숨겨져 있으리라. 그 중에 하나가 ‘수평과 수직의 조화’를 이룬 건축기법이다.
식물을 보더라도 잡초는 넓게 퍼지는 수평이다. 반면 나무는 수직이다. 수직은 하늘을 향하기 때문에 생동감이 넘친다. 수평과 수직이 함께 있는 것은 사람이 수평과 수직을 반복하면서 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같고, 밤과 낮이 반복되는 것과 같다. 모든 돌들이 세워졌거나, 모든 돌들이 눕혀졌다면 그런 효과가 연출되기가 어렵다. 단조로움 때문이다. 산은 생명력이 넘친다. 그 이유는 봉우리와 골짝의 무한 반복현상 때문이다. 굴곡의 곡선은 부드러움으로 ‘생명력’을 준다.
‘세운 돌’은 곧 지도자를 상징한다. 수평의 동물이 수직의 사람으로 진화하듯이, 평범한 백성들에서 수직의 지도자가 필요하다. 정명석 목사님이 자주 인용하는 ‘넓이와 높이’의 철학이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넓은 것은 보편적인 것이고, 높은 것은 특별한 것이다. 동물은 넓이에 해당되고, 사람은 높이에 해당된다. 야심작을 보면 마치 ‘한글의 문장’을 보는 듯 하다. 수평의 누운 자음과 수직의 세운 모음이 합해서 ‘글자’를 만들 듯이 야심작은 자음과 모음의 오묘한 조화로 이뤄졌다. 소나무는 느낌표와 쉼표처럼 문장의 부호로 보인다.
사람은 분명 만물의 영장이다. 수직의 직립보행은 보다 하늘을 중심하는 것이며,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모든 동물은 머리를 수평 아래에 둔다. 기린조차 머리를 아래에 둔다. 동물의 왕 호랑이도 머리를 하늘로 쳐들지 못한다. 오직 사람만이 일어나면서 하늘로 향한다. 머리를 하늘로 향하는 것!!! 이것은 ‘그리스도를 머리삼는 것’과 같다.
각자 머리가 그리스도의 머리로 향하는 것!!! 이것은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머리는 곧 생각이다.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머리가 진리를 향하는 것이다.
수평과 수직으로 조화를 이룬 야심작 중심에 하나님의 보좌가 계시니, 이는 ‘신령한 수직’이 그대로 성취된 것과 같다. 의자는 수평인데, 하나님의 의자이니 수직을 상징한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한 월명동 돌조경 작품이다.
PS. 하나님의 역사도 수직의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종급 차원에서 아들급 차원으로, 아들급 차원에서 신부급 차원으로 점점점 발전해 왔다. 발전의 방향은 ‘수평에서 수직으로 이동’이다. 진화론자들은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면서 ‘우연의 돌연변이설’을 말하는데, 그 우연속에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들어있다. 종급 차원에서 아들급 차원으로 진화는 차원성 진화로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의 진화이다. 그와 같이 아들급 차원에서 신부급 차원으로 대이동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역사의 진화이다. 모세를 통해 종급 진리를 주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아들급 복음을 주셨고, 지금 시대는 그를 통해서 신부급 사랑의 진리를 허락하셨으니, 인류문명의 진화론에 근거해서 얼마나 위대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 연못의 바위섬에 살고 있는 악어(鰐魚)처럼 입에서 감탄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