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진리의 새벽별이 비추었다.
새벽말씀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다. 잠언을 직접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시간도 단축되었다. 밀물에서 썰물로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어제처럼 질문을 통해 성도들의 답을 듣는 시간도 있었다.
그가 물었다.
“지금은 무슨 시대입니까?”
나는 생각 노트에 썼다.
1. 인터넷 시대
2. 정보혁명의 시대
3. 성약 시대
4. 미디어 시대
5. 여론 시대
6. 언론 시대
7. 문화 시대
8. 성령 시대
답은 없었다. 정답은 “실체 시대”
그가 말했다.
“실체 시대입니다. 지금은 명함시대가 아니고, 간판 시대가 아니고, 실제로 행하는 실체 시대입니다.”
그 일을 안하고, 명함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즐비한 시대다. 특히 한국민족은 언어감각이 있다보니, 명함을 즐기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조기축구회를 만들어도, ‘조기 축구회 회장’ 명함을 파고, 이름도 ‘송파구 경제인 축구연합회 회장’이라고 판다. 그래서 명함만 보고는 그 사람을 알 수가 없다. 송파구 경제인 축구연합회 회원들이 몇 명인지, 어떤 경제인들이 속해 있는지 실제로 확인해 봐야 알 수 있다. 명함은 하나의 간판에 불과하다. 간판은 하나의 표시다. 간판을 보고 들어가서 해당되는 물건이 있으면 사는 것이다.
명함(名銜)은 성명(姓名)과 관함(官銜)의 줄임말이다. 성명(姓名)은 성씨(姓氏)와 이름이다. 성씨(姓氏)는 어머니의 성(姓)과 아버지의 씨(氏)를 말하고, 명(名)은 불리는 이름이다. 성명(姓名)의 본질은 어머니의 성과 이름인데, 가부장적 시대가 되면서 아버지의 씨를 따르게 되었다. 관함(官銜)은 관직과 함(銜)을 의미한다. 함(銜)은 행(行)과 금(金)이다. 말(馬)이 행하는데 입에 물린 재갈이다. 재갈은 곧 말(馬)을 상징하는 단어다. 관함은 관리가 탄 말을 의미하며, 이는 벼슬을 말한다. 관함은 사회활동의 이력과 경력을 말한다.
명함(名銜)은 이름과 직함이 적혀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이력서를 가지고 명함으로 활용했는데, 시대가 좋아지다보니 손바닥보다 작은 명함을 건네면서 서로 통성명을 한다. 명함만 주고받으면 이름만 주고받는 정도에 그친다. 깊은 관계가 되려면 명함의 문턱을 넘어서야한다. 명함은 곧 ‘문턱’에 해당된다. 집앞에 문패가 있는 것과 같다. 명함을 통해 상대의 주소를 확인하는 것이고, 그 사람을 자세히 알려면 사연을 들어봐야 아는 것이다. 명함 자체를 그대로 믿으면 항상 낭패를 당한다.
나도 명함이 수십개는 된다. 그만큼 사회활동을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많은 명함보다는 1개의 명함만 사용한다. 나의 사회적 명함은 서울교육방송 보도국장이고, 종교적 명함은 기독교복음선교회 성도다. 실제로 하는 일은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이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고 ‘서울교육방송 보도국장’이란 명함으로 사회활동을 한다면 낭패를 당할 수 있다. 그 직함은 그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는 내 직함에 맞게 그렇게 지금껏 활동해 왔다. 명함은 반드시 그 행함의 증표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무에 사과가 열리면 ‘사과나무’라고 한다. 그 열매를 통해 나무를 평가한다. 그와 같이 사람은 그 행함의 실력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명함에 해당되고, ‘그 행함’은 실력을 말한다. 명함은 ‘이름’이라고 보면 된다. 자신이 하는 실제 활동을 명함에 적으면 되는데, 대부분 부풀려서 적다보니 ‘명함의 신뢰성’이 바닥에 추락한 것이다. 그래서 명함은 참고사항이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고, 행함을 자세히 파악하면서 대하는 것이다. 상대를 파악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것도 내놓으면서 대해야 실수가 없다. 명함을 주면서 상대의 명함을 받듯이, 자신의 사연을 주면서 상대의 사연을 듣고, 자신의 정보를 주면서 상대의 정보를 얻는 것이다. 자신의 것은 주지 않으면서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면, ‘취재하듯’ ‘심문하듯’ 느껴질 수 있다.
4 Comments
김영숙
하 부지런히 글을 쓰시는군요
샘의 말씀에 날개를 달아주십니다!
장창훈 보도국장
^^*^^
하늘구름
한문책을 본 적 있어요…찾아서 본건 아니고 우연히 봤는데…깜놀했던 적이 있네요~맞지요?
장창훈 보도국장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