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 1판에 1만원이다. 비트코인으로 1만코인이 있다면, 그 가치는 1만*1천만원=1000억원이다. 1만원과 1000억원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것이 단위의 다름이다. 단위는 곧 차원이라고 한다. 사람이 차원을 달리하면 완전히 달라진다. 차원은 100%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가령, ‘100’이라고 하자. 모두 100이 있는데, 그래서 모두 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100에 무엇이 붙느냐로 완전히 달라진다. 100원 100달러 100만원 100억원 100조원 100돈 100명 100만명 100조명…. 단위가 이렇게 의미를 달리한다.
유방이 천하통일을 하고 한신을 불렀다.
한신에게 묻기를 “그대는 몇 명을 거느릴 수 있는가?”
한신이 대답하길 “저는 100만명을 거느릴 능력이 있습니다.”
기분이 좋은 유방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나는 몇 명 정도 거느릴 능력이 있는가?”
한신이 대답하길, “왕께서는 100명정도 거느릴 수 있습니다.”
유방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내가 100명을 거느리고, 그대는 100만명을 거느릴 능력이 있는데, 왜 그대는 내 밑에 있는가?”
한신이 대답했다.
“저는 병사 100만명을 거느릴 능력이 있고, 왕께서는 장군 100명을 거느릴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왕의 밑에 있습니다.”
100만과 100으로만 비교하면 100만이 훨씬 크지만, 단위가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신은 100만원, 유방은 100만원권 지폐가 100개이니, 1억원인 것이다. 숫자로만 보면 100만이 훨씬 커 보이지만, 단위가 붙어서 들어가면 100이 훨씬 커보인다. 가상화폐는 이와 같다.
비트코인이 처음 나왔을 때는 쳐다도 안봤다. 왜냐면, 아무도 모르니까!!! 1만비트코인이 1만원에 살 수 있었다. 1000억원을 1만원에 살 수 있는 때가 있었다. 무형의 가상화폐에 도대체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예수님이 처음 태어나서 설교를 시작했을 때, 누구도 쳐다보지 않듯이 그러했다. 오죽했으면 베드로같은 어부가 예수님을 따라다녔겠는가?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예수님을 국가의 해악으로 보고, 독버섯 같은 존재로 취급했다. 비트코인이 실제로 그러하다. 많은 국가에서 비트코인을 ‘범죄의 화폐’로 규정하면서, 접근을 방해했다. 그러나, 비트코인 가격은 700만원에서 내려가지 않고 있다.
비트코인이 내려가지 않은 이유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서 그렇다. 비트코인의 가치는 모든 가상화폐의 기준점으로서 가치이다. 또한 인터넷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스마트폰이 모든 인류의 두뇌가 되면서, 인터넷 혁명의 시대에 적합한 가상화폐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면서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비트코인도 처음엔 보잘 것 없었다. 마치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는 말처럼, 비트코인이 1원이었던 적도 있다. 때론 줘도 안 갖는 시기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마치 예수님이 지금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인정받듯 그렇다. 빌라도 밑에서 비서실장을 했던 인물은 누군지 모르지만, 예수님 밑에서 수제자를 했던 베드로는 초대교황으로서 추앙받는다. 이와 같다.
인생은 누구나 미래가 있다. 현실은 보잘 것 없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비바람 몰아치고 눈보라가 내려도 바위틈에서 소나무가 곧 죽을 것처럼 짓밟혀도 굳세게 버티면, 언젠가 사람들이 찾아올 때가 있다. 비트코인처럼 모두가 알아줄 날이 온다. 인생은 결국 현실에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다. 가상화폐는 믿음의 화폐이다. 첫째, 모두가 믿을만한 화폐라면 믿음은 현실이 된다. 갈수록 그 가치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둘째 가상화폐의 가치를 스스로 믿고 인내로서 기다린다면, 그 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 비트코인은 수량이 한정되어서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고, 비트코인처럼 투자에 적합한 가상화폐는 많다. 단지, 조건을 따지면서 스스로 판단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