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바치라”(놔둬서 썩고 녹슬 물건을 바쳐서 생명의 전을 만들라)는 하나님의 영감을 음성으로 들은 정명석 목사님이 고향에 교회를 건축하셨다는 일화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언어는 상대성과 시대성의 옷을 입고 있다. TV는 1970년대 가치와 지금의 가치가 확연히 다르다. TV에 대해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르다. 그 일화를 들을 때, 나를 포함한 독자는 반드시 그 당시 TV의 가치와 정명석 목사님이 인식하는 TV의 의미를 깊게 들음으로 인식해야 그 감동이 더욱 깊어진다. 이것이 언어의 내면이다.
“TV를 바치라”는 의미는 “이삭을 바치라”는 성경적 사건과 맥이 이어질 것이다. 또는 예수님께 기꺼이 부은 마리아의 향유옥합과 같을 것이다. 가장 존귀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을 의미한다. 파월, 재파월을 통해 귀국하면서 사서 가져오신 TV였으니 얼마나 값진 물건이었을까?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삶의 간증은 그 진실함이 강물과 같다. 행하셨으니, 그의 말씀은 진실하다. 언제 들어도 동일하다.
당시 TV는 10만원 정도 했는데, 지금의 10만원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TV가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진산면 일대에서 TV가 거의 없던 시절이니, 상대적 가치는 엄청난 것이다. 대부분 조선 나이키(검정 고무신)을 신고 있을 때, 나이키 신발을 신고 나타난다면, 이미 승자다. 모두 자전거를 타고 갈 때, 그랜져를 타고서 등교한다면 이미 승자다. TV의 당시 가치는 그보다 더 컸을 것이다.
그는 육적 TV를 바치고, 영적 TV를 받으셨다.
[고린도전서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과연 아브라함은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믿음으로 바치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바치고 사망에서 살아나 부활을 이루셨다. 과연 정명석 목사님은 10년의 십자가 기간을 내어줌으로 갇힘에서 자유를 얻고 사랑의 부활을 얻으셨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직하시다. 자판기도 동전을 넣고 선택하면 그 물건을 내어주고, 인터넷 쇼핑몰도 물건을 고르고 값을 지불하면 택배로 배달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시랴. 천국의 쇼핑몰은, 천국의 자판기는 의로운 값에 따라 신령한 선물을 주심을 믿는다.
한국 사람은 공짜 심리가 너무 강하다. 공짜 심리는 안좋다. 나폴레옹조차 이집트에서 오벨리스크를 운반할 때, 단돈 얼마여도 값을 지불하고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모든 값은 지불한 것은 아니지만, 약탈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값을 정해서 가져온 것이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사라가 묻힐 무덤터 막벨라 동굴과 인근 산지를 얻기 위해 은 사백세겔 값을 지불한 장면이 나온다.
누군가 어떤 높은 위치에 올랐다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서 그 위치에 오른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결코 공짜가 없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리라”고 하나님이 약속했어도, 목숨을 걸고 전쟁을 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며, 여호수아와 막역한 사이였던 갈렙조차 철병거가 위치한 적진을 지목하면서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했으니, 공짜는 없는 것이다. (유다지파에 속한 갈렙의 위대한 정신이 다윗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비행기로 사는 사람이 있고, 자동차로 사는 사람이 있고, 오토바이로 사는 사람이 있고, 자전거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 차원이 각양각색이다. 비행기는 공중의 하늘을 나는 기계이므로, 영적인 차원을 상징한다. 그가 영적 TV를 받으셨듯이 영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그 차원이 비행기를 타고 비행하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