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내가 재건축재개발 언론사에 근무했을 때, 사실확인의 저널리즘으로 기사를 썼는데, 내 기사를 문제삼는 부류가 꼭 있었다. 반대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의견은 곧 그 사람의 위치라는 것을. 내가 옳게 행했는데 나를 반대하는 자가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위치다. 진리는 곧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이고, 측량의 저울이고, 때를 파악하는 시계다.
내가 쓴 기사에 대해 3가지 부류가 있다. 첫째, 정말 좋다는 부류다. 둘째, 문제가 있다는 부류다. 셋째, 문제가 있다고 한 사람이 있으니, 삭제하라는 부류다.
그때마다 나는 기사를 다시 검토한다. 기사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본질의 위치가 확인되면, 반대자의 위치를 판단하다. 기사를 반대하는 자는 곧 기사의 본질의 반대에 위치하는 자에 불과하다. 본질은 속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물처럼 유유히 돌아서 처리해 버린다.
호칭문제도 그렇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니, 유대인들이 싫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여!!”라고 불렀는데, 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으니, 하나님을 참칭한 죄로 고발당한 것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고, ‘OOO’ 또는 ‘아무개’로 호칭한 것이다. 본래 하나님의 존함은 ‘야훼’로 불리는데, 그 이름을 감히 부르지 못하고 ‘여호와’라고 불렀던 것이다. 옛날 조선시대에 왕의 존함을 감히 부르지 못하니, ‘전하’라고 불렀던 것과 같다. 전하(殿下)는 왕이 거하는 집을 지칭하면서 신하의 위치를 부르는 호칭이다.
호칭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말하는 것이 그 사람의 주소다. 섭리를 반대하는 자는 반대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들의 위치’여서 그런 것이고, 하나님의 존함을 감히 부르지 못하는 것은 ‘종의 위치’여서 그런 것이다. 기독교는 모두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을 찾는 것은 곧 “예수님께 속한 신약인”이라는 뜻이다.
내게 많은 사람이 연락이 온다. 글이 좋다는 부류, 글이 안 좋다는 부류로 갈린다. 글이 안 좋다는 부류도 2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내 글속에 고칠 부분을 알려주는 부류와 글을 없애길 원하는 부류다. 글을 없애길 원하는 부류도 들어보면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성령의 뜻이냐”를 묻는다. 나는 성령의 감동으로 글을 썼다고 믿었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므로, 물었던 것이다.
호칭(呼稱)은 부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느냐가 그 영적 주소다. 부부는 서로 ‘여보와 당신’의 호칭을 사용한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위치는 그렇게 호칭하는 것이다. 정명석 목사님을 통해서 배운 신비한 영적 말씀이다. 왕과 신하의 관계가 다르고, 왕과 왕비의 관계가 다르다. 왕과 왕비의 관계를 놓고, 신하들이 왈가불가하면, 법이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신하들이 왕에게 대하는 것을 놓고, 일반 백성들이 왈가불가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일반백성과 왕의 관계는 구약식, 신하와 왕의 관계는 신약식, 왕비와 왕의 관계는 성약식이다.
‘여보, 당신’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여보, 당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절대적 사랑이다. “내 것”이 되어야 그때 모든 것을 준다. 100%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시대 사명자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뇌(腦)는 글을 담는 그릇이다. 잉크통은 잉크가 담겨있고, 쓰레기통은 쓰레기가 담겨있다. 뇌는 무엇을 담느냐로 그 운명이 결정된다. 뇌의 생각은 하나다. 내가 만약 여기에 있으면 저기에 없는 것과 같다. 뇌는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생각은 그 중에서 하나만 잡을 수가 있다. 생각은 2개를 동시에 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집에 있다는 것은 집이 아닌 다른 모든 곳에 없다는 것과 같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핸드폰의 문자를 보내면 절대로 핸드폰 문자만 보이지, 상대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생각의 비밀이다. 수업시간에 그 수업을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지금 A를 만나면, B를 못 만나는 것이다. 지금 이 일을 하면, 저 일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