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교육칼럼]=박사(博士)는 지식층의 최고 정상에 위치한 지도층이다. 도달하기가 상당히 까다롭다. 자격증은 따기 쉽다. 민간자격증은 교육과정 수료후 이론시험만 합격하면 대부분 합격이다. 반면 국가공인자격증은 따기가 어렵다. 박사(博士)는 공인된 지식 문화재와 같다. 박사들이 많아도, 드믈다. 그만큼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博)은 넓을 박(博)이다. 박사는 ‘높음’의 뜻을 가질 것 같은데, ‘넓음’이다. 왜 박사는 ‘넓게’를 의미할까? 한 분야에 몰입해서 최고 정상을 이뤄야할 박사가 왜 ‘넓게’의 의미로 사용될까? 그 이유는 융합에 있다.
전공(專攻)은 말 그대로 그 분야에만 몰입한다. 학부는 전공분야다. 자기 것에만 몰입하는 것은 선택과 집중에 탁월하다. 그러나 옆을 못 본다. 전공은 앞만 보는 것이고, 박사는 옆도, 뒤도, 위도, 밑도, 미래도, 과거도, 자신까지 두루 살펴보는 것이다. 자신의 전공분야와 연결된 모든 분야를 통섭하고, 그러한 배경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을 증명하는 것, 논문을 연역법적으로 증명하는 것, 그것이 박사과정이다. 전공은 귀납법적 증명이라면, 박사는 연역법적 증명이라서 모든 것을 두루 통섭해야한다. 자신의 전문분야와 연결된 모든 것을 아는 분야가 바로 ‘박사과정’이다. 그래서 ‘넓을 박’(博)이 사용된 것이다.
박(博)에는 열 십(十)이 사용되었다. 최소 전문분야와 연결된 10개의 학문을 통섭하고, 전문분야를 10개로 파생해서 가지를 뻗는 과정, 그것이 박사과정이다. 전공분야를 흔히 가지로 비유하는데, 박사과정은 그 가지에서 더 많은 가지가 뻗어서 열매를 여는 것이다. 오로지 1개의 가지만 뻗는 것이 아니다. 두루 모든 것을 섭렵하고, 특히 현장과 연결해서 실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박사(博士)다. 박사의 말을 들어보면 대체적으로 이치에 맞다. 왜냐면 현실에 기반해서 자신의 논문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동안 존재한 학설을 기반으로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박사의 높은 위치에 이르기 위해서 ‘넓은 포용력’을 가져야한다. 박사는 산의 최고 봉우리다. 백두산, 대둔산, 지리산 등등 지도에서 보면 뾰쪽하게 솟은 그 봉우리에 실제로 올라가면, 드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봉우리는 절대로 꼭지점이 아니다. 지도로 축소하니 삼각형의 꼭지점으로 표시되고, 더 축소하니 山처럼 송곳 모양으로 보여질 뿐, 산꼭대기는 넓은 평지가 있다. 박사과정은 그처럼 넓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내 것만 고집하는 사람은 전문가이고, 내 것과 함께 상대의 것, 남의 것, 과거의 것, 미래의 것, 주변의 것까지 두루 섭렵해서 자신의 것을 결합하는 사람은 감나무의 접붙힘 원리를 터득한 ‘화합의 박사’로서 살아가는 삶이다. 유럽의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학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생물학적 이론중에서 ‘자기생산의 체계이론’을 차용해,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사회학 이론’을 재정립했다. 사회학과 생물학이 만나게 된 매우 중요한 이론으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학 이론은 유럽의 기초학문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성공한 학자를 꼽는다면 니클라스 루만이다. (단지, 한국에는 아직 덜 알려져 있다.)
사람은 입과 귀와 눈과 코가 있다. 이목구비(耳目口鼻)라고 한다. 이목구비가 얼굴에 붙어 있는 것은 그 기능이 매우 중요하기때문이며,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사용하도록 창조주가 설계한 것이다. 귀는 곧 들음이고, 입은 곧 말함이다. 들음과 말함은 반드시 함께 존재하며, 말함은 자기 것이고, 들음은 상대 것이다. 주장과 경청이 갖춰질 때 비로소 ‘화합’의 소셜이 작동한다. 목(目)은 눈으로 모든 것을 두루 살펴보는 것이며, 코(鼻)는 본래 자(自)로 표시하며, 공기를 내면에 넣었다가 뱉는 역할이다. 이는 안과 밖의 수수작용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과정이다. 눈이 외부를 살핀다면 코는 내부를 살핀다. 이목구비는 인생이 살아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생물학적으로도 그 기능이 유지되어야하고, 삶의 작동측면에서도 말함과 들음, 관찰과 반성의 과정이 꼭 필요하다. 이것이 인생박사가 되어가는 아름다운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