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아멘”의 말씀이었다.
“바다에는 파도가 항상 출렁거린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도 그 얼마나 깊고 무게감있는 말씀인지, 숙연해졌다.
인생은 3가지 부류가 있다.
1. 영혼이 잘됨같이 육신이 잘되는 부류
2. 영혼과 상관없이 육신이 잘되는 부류
3. 영혼이 잘되는데 육신이 안되는 부류
4. 영혼이 안됨같이 육신이 안되는 부류
1번과 4번은 동일한 관계다. xy의 1차함수 비례법칙이다. y=ax가 1번과 4번이다. a는 기울기로서 신앙의 절대성, 기울기가 급경사일수록 잘됨의 크기가 커진다. a가 만약 500이면, 영혼이 1이 잘되면 육신은 500배 잘된다. a가 1500이면, 영혼이 1이 잘되면 육신은 1500배 잘된다. 휴거가 700선이면, a가 700이라고 생각하고, 휴거가 1000선이면, a가 1000이 된다. (x는 영혼, y는 육신) 이러한 비례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잘됨같이 잘됨’이라서 그렇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관권에 속하면 그 영향을 받게 된다.
2번은 영혼과 상관없이 육신이 잘되는 부류로서, 선분인생이다. 1차 함수는 직선으로 무한대까지 확장된다. 그러나 2번은 그저 육신만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100년의 선분으로 끝난다. 선분의 끝은 곧 무덤이다. 무덤외에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랴. 과연, 태종 이방원이 어디에 있을까? 과연 부유했던 조선의 귀족들이 어디에 있을까? 과연 영예를 누렸던 고려의 왕족들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육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들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그들을 부러워할 것이 전혀 없다. 대통령 단임제처럼 한계가 분명한 향락은 치명적 위험이 지뢰처럼 따라온다.
1번과 2번과 4번은 모두 이해가 되는데, 3번은 무엇일까? 3번의 경우도 분명 있다. 영혼이 잘되는데 육신이 안될 때가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여기에 해당되고, 욥의 인내가 그러하고,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기전까지 기간이 여기에 해당된다. 죽음에 직면한 모르드개가 여기에 해당되며, 순교로 목숨을 잃었던 거룩한 영혼의 삶이 그러했다.
3번은 2차 함수와 같다. 이차함수는 변곡점까지 반비례 관계를 형성하다가, 변곡점에서 정반대로 뒤바뀐다. 변곡점 이후는 영혼이 잘됨같이 육신이 잘되듯이 비례관계가 된다.
빛이 비추면 아침이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다. 정녕 그러하다. 그 시대 진리의 빛이 비추면 낮이요, 아침이다. 진리가 없으면 어둠이요, 무덤이다. 무덤속에서 즐기는 진리없는 향락을 부러워할 것이 무엇이랴!!!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도 항상 ‘포함과 배제’를 말했다. 포함과 배제는 이미 창세기 1장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빛이 있으라 하므로, 빛이 있었고, 빛과 어둠이 나뉘었다. 어둠은 빛이 없는 모든 곳이다. 넓이와 상관없다. 빛이 있으면 아침이요, 낮이다. 나머지는 어둠이요, 밤이요, 무덤이다. 진리의 빛이 있는 곳, 그곳은 영원하고, 나머지는 어둠이다. 어쩔 수가 없다. 생명과 사망이 그것으로 나뉨은 ‘포함과 배제’로 그러하다. 깊고 깊고 깊은 절대성의 말씀을 듣고, 믿고, 깨닫고, 행함의 결단을 하게 되니, 얼마나 행복한가!!!
사람이 자신의 삶을 10년 단위로 그래프를 그려본다면, 하나님의 주관권에 있는지, 혹은 하나님의 주관권에서 핵심부에 있는지, 세상 주관권에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관권에 속할수록 급경사를 이루면서 비례관계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