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육방송 신앙칼럼]=창세기는 인류창조 및 종교역사의 설계도이다. 특히, 아담과 하와의 타락, 타락이후 형이 동생을 죽인 존속살해사건은 인류의 비극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추앙하지만, 그 피는 아담과 하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설령 셋의 후예라고 하여도 그 행위는 카인의 후예가 되고 말았다. 피는 피일 뿐, 행위가 그 족속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피에 있지 않고 약속과 행위에 있음은 사도바울의 갈리디아서 서신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삭의 후손임을 자부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행위로서 하갈의 족속임이 사도바울의 논증법이다.
갈라디아서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아브라함에게 두 여인이 있었으니, 하갈과 사라다. 하갈은 곧 몸종이요, 사라는 부인이다. 사도바울은 “두 여인은 비유다”라고 정의했다. 창세기에 실제로 살았던 두 인물을 상징성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갈은 율법을 상징하고, 사라는 약속의 법으로 복음을 상징한다. 절묘한 해석이다.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한다. 아담은 첫 아담, 예수님은 후아담이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은 동족상잔의 비극처럼 예수님을 살해했다. 아담 가정에서 장남 가인이 차남 아벨을 죽였듯, 유대교가 신흥종교 그리스도교를 핍박하고, 십자가의 형틀에 묶어서 로마법의 도구로 살해했다. 창세기 사건이 확대해서 재현된 것이다.
성경이 기록하길,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가인은 멀리 내쫓았고, 아벨은 살아나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죽으면 죽은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비극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대로 재현되었다. 살인범의 운명은 유랑자의 신세다. 이스라엘 민족은 십자가 사건 이후 2천년의 형벌을 받았고, 1948년이 되어서야 그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셋’이 모든 유업을 이어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아벨처럼 죽임을 당했으나, 아벨 대신 셋이 아담의 유업을 이어 받았다. 아담과 예수의 관계가 첫아담과 후아담의 관계로서 가인과 아벨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셋은 누구일까?
예수님은 후아담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둘째 아담이다. 아담이 첫아담, 예수님은 둘째 아담, 성약시대의 문을 열 시대 사명자가 셋째 아담인 것이다. 셋은 셋째 아담의 상징성이다. 창세기의 완성은 아담의 족속이 아니다. 또한 아벨의 족속도 아니고, 오직 셋의 족속으로 완성되었음을 주목해야한다.
누군가 만약 역사의 예수가 다시 살아나서 이 시대에 온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창세기에서 아벨이 다시 살아나서 아담의 상속을 받았다는 것과 같다. 아벨은 죽었고, 그것으로 끝났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육으로 이미 죽었고, 영혼으로 부활해서 2천년이 흘렀다. 2천년이 흐른 지금, 새로운 성약은 새로운 인물로서 셋과 같은 전혀 다른 인물이 바톤을 이어받는 것이다. 셋이 아벨 대신에 상속을 이어받았듯, 성약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바톤을 이어받아서 그 뜻을 펼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2가지로 압축하면, 십자가 사건과 성전 파괴다. 둘은 같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후, 40년만에 예루살렘 성전은 멸망당했다. 아벨이 죽임을 당한 사건과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왕권의 부활로서 민족의 예언을 이루었으나,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듯이 성전이 멸망당했다.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받을 ‘셋’의 상징인물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다. 신약성경 계시록도 멸망당한 예루살렘 대신에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벨처럼 죽임을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이어받은 창세기 ‘셋’의 상징성은 ‘십자가 사건과 성전 건축’으로 완성되는 것이 역사의 이치다. 누군가 만약 십자가 사건과 성전건축으로 이 시대에 출현한다면, 그가 창세기가 지목하는 ‘셋’의 주인공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한 성약의 주인공일 것이다. 주인공은 조명을 받는 것이고, 예언은 주인공을 지목하기 마련이다. 예언은 예언을 이룬 자가 곧 주인공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의 10년 십자가 사건 이후, 월명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연성전 건축완성이 사람의 일로 생각되지 않는다. 신비한 성경이 지금 이뤄지는 것처럼 가슴 벅차다. 너무 절묘한 예언의 성취를 목도하면서 이 글을 남긴다.
창세기 4: 25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아담이 셋을 낳은 후, 고백하길 “다른 씨”라고 표현했다. ‘다른 씨’는 곧 상징성이다. 사도바울이 논증하길, 이스라엘은 율법의 씨요, 예수 그리스도는 약속의 씨라고 했다, 율법은 종의 씨요, 약속은 이삭으로 아들의 씨다. 그렇다면 셋은 전혀 다른 씨앗으로서, 종도 아니고, 아들도 아니고, 새로운 ‘사랑의 씨앗’으로 오는 것이다. 같은 씨는 같은 족속이고, 다른 씨는 다른 족속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전혀 다른 씨로 이 땅에 왔듯이, 새롭게 오는 성약의 주인은 새로운 씨, 즉 ‘다른 씨’로서 이 땅에 오는 것이 역사의 이치다.
** 해당 칼럼은 정명석 목사님의 성경이론에 근거한 신앙칼럼입니다. 성약(成約)은 이룰 성(成) 약속 약(約)으로 신약에서 예언한 약속을 완성하는 시대로서, 창세기의 창조 7일째에 해당되는 천년역사를 의미합니다.